6. 본인 작품의 성격과 의미

  자연스럽다는 것은 그 대상이 부자연스럽지 않은 것, 곧 처음 볼지라도 낯설지 않고 편안하다는 의미이다. 임천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이러한 편안함을 담보로 한다. 산천을 마주할 때의 편안함은 현대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연을 찾게 하고, 또 화가로 하여금 산수를 화폭에 담아낼 것을 갈망하게 한다. 본인의 작품들은 이형사신의 사실정신에 입각하여 우리의 실경을 새롭게 표현함으로써 그러한 갈망을 풀어내고자 한 결과물이다.


  작품 1

작품 1. <맹개마을의 여름>, 118.0×91.0cm, 한지 수묵담채, 2016.
  안동시 도산면 청량산 자락에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퇴계 이황이 극찬한 ‘예뎐길’이 있다. 퇴계 이황이 도산서원과 청량산을 오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중턱에서 내려다보이는 ‘맹개마을’이 그림 같이 수려한 풍광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청량산이 보이고 강이 굽이쳐 흐른다. 조선의 선비라면 한번쯤 걸어보고 산수를 즐기고 진경시를 읊었을 법한 길이라 생각이 든다. 녹음이 짙은 여름날 싱그러운 자연은 흥치(興致)가 절로 난다. 그 흥을 연결시켜 여름 숲을 율동감 있게 표현하려 했다. 멀리 청량산은 대기원근법을 사용하여 안개처리로 생동감을 주고자 하였다. 가까이에 있는 수목들과 산들도 변화감 있게 표현해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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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융통성 있는 경영위치

구도는 화면 위에 미적 효과를 얻기 위하여 대상을 조직하고 배치하는 것이다. 구도를 위한 구도는 필연적으로 형식주의에 빠지므로, 구도는 주제의 내용을 벗어나지 않고 그 요구에 따라야 한다. 남제(南齊)의 사혁(謝赫, 479~502)이 제시한 화6(畵六法) 중 다섯 번째, 곧 경영위치가 구도를 뜻한다. 37)

이즈음의 산수화는 카메라의 사진 이미지가 실제의 이미지와는 알게 모르게 다른 모습으로 왜곡된다는 사실을 지나쳐 버리고, 카메라 시각의 일점투시법을 사용하여 화면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원근법을 사용하여 카메라 시각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 구도는 전통적인 사실정신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실경산수화의 공간구도는 예로부터 다시점이 적용되었다. 거기에는 무엇보다 의경(意境)이라는 추상적인 힘이 내부에서 작용하고 있는 까닭이다. 화면의 공간구성은 그러한 내적 필연성을 따라 이행되는 것일 뿐, 미리부터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은 실상 아무 것도 없다.

구도를 잡는 방법에는 우선 취함[]과 버림[]이 있다. 취함과 버림은 구도를 잡을 때 불필요한 것은 없애고 필요한 내용만을 잘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에 있어 객관적 존재의 말살이나 왜곡이 아닌 실제에 근거하여 중요한 부분은 취하고 군더더기는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현장에서 자연과 마주 앉으며 종종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 번잡하여 무엇을 버려야 하고 어디까지 취해야 하는지 어려움에 부딪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다시금 대상에 대해 먼저 주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동반자격인 객()을 살펴본다. 여기서 파악된 주와 객은 서로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다음으로, 구도에서 객은 있으나 주가 그 중심을 잡지 않으면 그림이 산만해 지고, 주는 있으나 옆에서 받쳐 주는 객이 없다면 단조롭고 변화가 없다. 그 밖에 주와 객이 대신할 수 없는 부차적인 볼거리 또한 하나의 요소이다. 연구자의 그림에서 예를 들면, 가송리의 전경을 그린 작품에서 농촌의 전경으로 제시된 경운기, 트랙터, 시골집, 비닐하우스 등이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주와 객 사이에는 대소 관계가 성립한다. 대체적으로 가까이 있는 산이 주로서 형태가 크고, 멀리 있는 산은 작아 객으로 작용한다. 다만 구도에서 큰 것이 주이기는 하지만 객이 될 수도 있는데, 이러한 변화를 줌에 있어서는 주제와 내용, 그리고 실제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구도를 처리하여야 한다.

한편으로, 구도를 달리 말해 치진포세(置陳布勢)’라 하였는데 이는 구도에서는 ()’가 중요함을 뜻한다. 이것은 곧 구도를 잡을 때 세가 형상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깨우쳐주는 말이다. 산을 그리되 그 기세가 부족하면 무미건조하게 될 것이다. 무릇 형상의 기세를 잘 표현하여야 실재성 있는 작품이 되고 그림은 생동감을 얻게 된다. 산의 기세는 서로 호응관계가 있어야 한다. 화면 속의 경치가 서로 고립되어서는 아니 되고 형상 간에 전후좌우의 연관성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연관성에 있어서는 또한 그림 안에서의 호응 관계뿐만 아니라, 여백을 통해 무한한 밖의 공간까지 연장시키는 그림 밖의 호응도 고려해야 한다.

여백은 화면에 연속성을 주어 그 답답함을 없애고 생동감을 준다. 여백과 실()은 상대적 개념으로, 여백이 있으므로 인해 실이 더욱 잘 표현되기도 하고, 반대로 실은 여백으로 인해 더욱 두드러지는 수도 있다. 산수에서 강물의 표현은 일필을 보태지 않아도 물로 인식된다는 특성으로 인해 그 빈 공간은 실이다. 여백을 남기는 것은 그러한 공간을 구성하는 것만으로도 예술적 표현에 있어서 특수한 표현방법으로 기능할 수 있다. 여백을 남김으로 인해 더욱 의경(意境)을 확대시켜 줄 수 있다. 38)

모름지기 산수화의 구도에 있어서는 성김과 빽빽함, 긴장과 이완, 마름과 젖음, 강한 곳과 부드러운 곳 등의 적절한 배치와 구성이 화면을 조화롭게 만든다. 따라서 음악을 들을 때도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 빠른 소리와 느린 소리, 긴장되는 곳과 느슨한 곳이 있듯이, 그림의 화면 속에서도 이런 것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37)왕백민, 동양화 구도론, 강관식 역, 미진사, 1991. pp.6,7

38)왕백민, 동양화구도론, 강관식 옮김, 미진사, 199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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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운필의 자유로움

필묵법이란 붓과 먹으로 그 대상을 화면에 표현하는 방법이다. 종이 위에 그어진 필획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명체이며 음악의 음표처럼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필획은 붓과 먹을 사용하여 그은 획이다. 곧 필묵의 흔적이다. 그 흔적을 통해서 형상을 표현한다. 먹을 사용하는 묵법으로는 먹물의 농담과 양을 조절하여 다양한 분위기를 표출할 수 있다. 충실 공간을 이루는 필획의 기와 빈공간의 기가 합쳐져서 감상자로 하여금 큰 울림을 받게 한다.

35)

석도화론 일획 장제1에 나오는 말이다. 화가가 능히 그 한번 그음으로써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전체를 포용하면서 그 좁은 캔버스에 그것을 압축하여 구현할 수 있다면, 그 화가의 의식에 의도성이 명료해질 것이며, 따라서 그 붓질도 투철해 질 것이다. 그러나 그 붓을 든 팔뚝이 허령하여 자유자재하지 못하면 곧 그 그림은 엉터리가 되어 버린다. 또 변증법적으로 그 그림이 엉터리가 되어 가면 따라서 팔뚝의 영기를 잃어간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그림의 생동감을 주기 위해서는 붓을 굴리며, 그림에 안정감을 주기위해서는 붓을 느긋하게 크게, 구애됨이 없이 움직인다.36)

현장사생에서 마음이 산수와 일체가 되면, 그 즐거움으로 인해 붓이라는 수단을 잊어버리고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붓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면서 운필의 자유를 얻게 된다. 앉은 자리에서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흥에 몸과 마음을 내맡긴다. 이제 손에 붓을 들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점, , 면의 추상화된 필획을 마음껏 자유롭게 구사(驅使)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

장자는 이것을 두고 득어망전(得魚忘筌)이라 했다.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버린다는 말이다. 뜻한 바를 이루고 나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썼던 수단에 대하여는 애착을 갖지 말고 잊어버리라는 말이다. 세상사의 이치도 마찬가지로 그 이치를 잘 알면 도리어 세상 속에서 자유로이 될 것이다. 획 또한 획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 획에 이끌러 다닌다. 한 획의 이치를 제대로 알고 난 뒤에는 붓과 먹의 구속으로부터 풀려나와서 형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35)박덕준, “필묵법의 5단계 서법의 체계화입법국정전문지 The Leader, 201610월호, pp. 42~44

36)김용옥, 석도화론, 통나무, 1992. p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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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현장 사생

1) 감동과 몰입

조선 후기 최북은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을 구경하고 황홀한 경치에 감탄하여 천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 하고 외치면서 구룡연에 뛰어들었다 한다. 다행히 그를 구해 주는 사람이 있어 죽지는 않았다고 하나 그 경치는 목숨을 던져도 아깝지 않을 만큼 빼어났으리라. 상상을 초월하는 금강산의 절경은 산수를 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 가보고 싶은 곳일 것이다. 이렇듯 아름다운 산수는 감상자의 정신을 빼앗는가 보다.

그러한 감동은 일상에서의 탈피와 자연과의 교감에서 오는 것이다. , 자연을 마주하지 않고서는 맛볼 수 없는 즐거움이다. 현장사생에서는 그 자연을 마주하고 화폭에 생생하게 담을 수 있어 좋다. 실내에서 맛볼 수 없는 바깥의 경치는 화가를 감동에 빠지게 하고 흥취와 즐거움, 그리고 삶의 활력을 가져다준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그저 바라보이는 것 이상으로 더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실경에 감동을 받았다면 비록 붓을 들지 않았어도 마음속에 이미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곳을 쉽게 만날 수는 없다. 멋진 실경이 어디에나 흔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차한 다음에 화구를 메고 마음에 드는 장소까지 걷거나 등반을 해야 한다. 때론 신발을 벗고 물을 건너야 하는 곳도 있다. 좋은 경치를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어려움은 늘 각오한다.

연구자는 가송리 농암문학관으로 가는 길 전망대에서 가을 풍광을 보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붓을 들 생각은 하지 않고 멍하니 경치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울긋불긋 단풍이 든 웅장한 산은 흰 구름으로 허리에 치마를 두른 듯하고, 유유히 강물이 흐르는 포근하고 아늑한 시골의 들녘에는 가을 곡식으로 넉넉하다. 무슨 연유인지 가슴이 하고 떨어진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니 스스로 놀라 쓸쓸함까지 밀려온다. 파란 하늘은 아득하고 고운 색채에 눈이 부신다.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이미 가을이라는 계절이 와서 산천을 온통 예쁜 물감으로 칠하여 놓았다. 다른 날에 오면 더 진하게 칠해 놓을 것이다. 얼른 이 가을의 풍정을 쫒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감정을 꾸역꾸역 추스르고 화폭에 붓을 들이댄다. “이렇게 그려야한다. 저렇게 그려야 한다.”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붓 가는 대로 감동의 물결을 따라 붓을 놀린다. 해는 쉬지 않고 뉘엿뉘엿 갈 길을 가고, 그림에 몰두해 있는 동안 미처 시간 가는 줄도 어두워지는 줄도 모른다. 산속의 어둠은 빠르다. 그제야 산속에 혼자인 것을 알아차리고 주섬주섬 화구를 챙긴다. 그리고 며칠 후 그때 다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다시 그곳을 찾았다. 차에 있어야 할 화구가방이 안 보인다. 어두워지는 줄 모르고 몰입한 그날, 어둠 속에 그만 화구가 묻혀 보이지 않았는지 차에 싣지 않았던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현장사생에 몰입해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보물과 같은 화구 가방을 잃어버린 날이었다.

해의반박(解衣槃礡)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송나라의 왕 원군(元君)이 널리 화공을 초청하여 그림 대회를 주관할 때 늦게 도착한 한 화공이 홀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옷을 풀어헤지고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화가로서의 느긋한 자세에 감탄한 일화를 일컫는 성어이다. 이러한 고사에는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취해야 할 바람직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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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점. 선. 면
  회화 예술에 있어서 점, 선, 면은 그 기본적 표현 요소이자 매체이다. 그럼에도 이것 자체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존재자일 따름이다. 점은 이웃하는 점들과의 관계 등에 따라 공간감, 형태나 움직임을 나타낸다. 점들의 간격이 좁고 넓음에 따라 수축된 느낌과 느리고 이완된 느낌을 주고, 점의 크기를 점차 줄이거나 늘임으로써 운동감이나 공간감을 주기도 한다. 이 외에도 점은 산수화에서 의미와 감정을 표현하는 데 다양하게 활용되는 요소이다.
  선은 어떠한 추상 관념을 시각화한 ‘획(畫)’으로 나타난다. 선은 동양화의 주된 재료인 먹의 특성 때문에 그 비중은 가히 동양화를 ‘선의 예술’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산수화 준법에 있어 선은 형태, 질감, 양감, 원근감, 운동감, 생명력, 정신성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 수단이다. 면은 선이 합쳐져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림 . <필운대>, 겸재 정선, 1753경, 종이에 수묵담채, 29.5 x 33.7 cm. 간송미술관
 부벽준과 같이 폭이 있는 획에서 단번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내용이 드러나는 예는 무수히 많다. 가까운 예를 하나 들어서, 겸재 정선이 1753년 무렵에 그린 <필운대(弼雲臺)> 그림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겸재 정선이 1753년 무렵에 그린 것으로, 이곳 인왕산 필운대 아래에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종로구 필운동 88번지 일대로 현재 배화여고가 들어서 있는 자리다. 겸재는 이 경치를 어느 시원한 여름날 화폭에 올린 듯한데, 뒤편 인왕산 봉우리를 거의 생략해 버리고 낮은 구릉만 태점(苔點)과 흐린 윤곽선으로 간결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2단으로 된 필운대의 석대상(石臺狀)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상단 뒤 석벽 아래는 노송림(老松林)으로 병풍을 둘러 석벽을 가려 놓았다. 대담한 청묵선염법(靑墨渲染法)과 거친 파묵(破墨)으로 일관한 호방한 필법인데 필운대의 삽상(颯爽)하고 청랭(淸冷)한 정취가 고스란히 살아나는 느낌이다.34)
  음양 조화의 감각을 잘 드러낸 그림이다. 점 형태로 표시한 구릉의 숲과, 절대준으로 처리한 돌의 표면 및 입체감, 그리고 죽죽 그어 내린 선 형태의 송간(松幹) 표현 등에서 점, 선, 면의 추상적 표현 요소를 또한 가려낼 수 있다. 이렇듯 진경산수는 사실화법과 추상화법을 동시에 아우른다.


34) 최완수, 『겸재 정선3』, 현암사, 2009. p.323

2) 색채와 먹

현대에서 먹은 일상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드물다. 수묵화가 오랜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먹이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이다. 또한 수묵화를 감상할 때에도 먹의 특성과 그 용법보다는 형이상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기 일쑤다. 이러한 경향은 수묵화에 대한 이해와 수묵화의 발전을 가로 막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전통의 것을 살리는 가운데 새로운 창작의 실마리를 찾으려면 전통적 표현 재료인 먹의 물성 및 용구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

먹은 농담, 건습, 흑백으로 물상의 색과 빛을 표현해내는 무채색의 안료(顔料)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예로부터 묵유오채(墨有五彩)라는 말이 전하니, 먹에는 온갖 색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무채색이 모든 색의 소멸로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모든 유채색이 이로부터 새로 시작되는 근원이기도 하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준다. 곧 먹의 빛깔은 우주의 본색을 상징하는 현색(玄色)으로 인식된다. 33)

수묵화에서는 이러한 무채색의 먹물을 통해 선을 긋고, 바림질을 한다. 푸른 하늘과 물빛을 화폭 속에서 여백으로 남겨 두는 것은 고유색에 대한 집착, 선입견을 벗어던진 것이다. 물빛은 일반적으로 하늘빛을 반영하지만 눈이 오거나 흐린 날은 검은 빛, 푸른 숲 아래에서는 녹색 빛, 계절이 달라질 때마다 시시각각 다른 빛을 낸다. 이렇듯 하나의 대상에게도 수많은 빛깔이 담겨 있기에 그 대상의 고유색이라는 것은 실상 자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대상의 다양한 색채 속에서도 물빛이 본래 무색인 점에 있어서 그 본질을 상정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본질은 어떠한 색채에 얽매이지 않으니 추상의 영역으로 볼 수 있다. ‘색채추상이라는 말이 있은 즉, 이것은 사물의 고유색에 얽매이지 않고 그 대상에 있어서 음양의 관계와 그 대상을 관찰하는 주관적 감각을 살려 상징적으로 빛깔을 나타내는, 어떠한 의미에서는 그 본질을 표현하고자 하는 방법이다. 먹이 곧 색채의 상징이요 추상이다.

33)정종미, 우리 그림의 색과 칠, 학고재, 2001. p.153


4. 표현법의 현대성

  전통의 현대적 계승은 실경산수화가 안고 있는 하나의 과제이다. 흔히들 전통과 현대는 양립하기 어려운 관계로 보고 있다. 왜 그런 것인지 따져 볼 일이다. 먼저 현대성이란 말이 새로운 것을 뜻하는지, 아니면 본질적인 것을 뜻하는지 질문해 보자. 물론 그 둘 다가 해당될 것이다.
  가령, 맷돌의 기능은 거친 곡물 따위를 곱게 갈아내는 것이다. 요즘은 믹서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믹서는 과실, 곡물, 야채 등을 갈거나 이겨 가루 또는 즙을 내는 맷돌 역할을 대신하는 현대의 물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맷돌의 덕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지금도 현무암을 쪼아서 작게 만든 재래식 맷돌의 인기가 높다. 그 까닭은 직접 손으로 돌려서 갈아내는 느림의 미학을 통해서 곡물이 갈릴 때 나오는 향기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천천히 흘러나오는 즙액의 향기와 빛깔, 이것을 순식간에 갈아내는 믹서의 성능이 대신 가져다줄 수 없다. 맷돌을 만드는 마조장(磨造匠)의 이마에 흐르는 땀과 그의 마음속 희열을 상상해 본다.
  커다란 맷돌이 사실상 쓸모가 없어졌을 때 맷돌 장인은 고민에 빠졌다. 가족의 수는 줄고 새로운 기계가 나왔다. 맷돌의 장점을 어떻게 하면 살려낼까 궁리하였다. 자그맣게 만들고 더 정교하고 예쁘게 만들었다. 곡물 영양소 파괴가 없고 투박하면서도 앙증맞은 작은 맷돌은 보기에도 좋다. 가히 ‘전통의 현대적 계승’을 이루어낸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현대성이란 결코 새롭기만 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오래되어 익숙하고 자연 소재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 정서적으로 가까운 동시에 아직도 그 본래적인 기능을 잘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즈음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때, 그것이 오히려 참다운 의미의 현대성이 아닐까 한다.
 
  1) 사실정신과 추상
  실경산수화는 전통회화의 한 갈래이다. 이 그림의 덕성은 사실성과 추상성을 아울러 지니고 있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산수 그리는 마음을 “이형사신(以形寫神)의 사실정신”이라고 한다. 형상을 빌어서 산수의 정신적 본질을 그린다는 것인 즉, 일찍이 발달한 인물화의 “전신(傳神)”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실재하는 산수 자연을 마주하여 그 경치의 아름다움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동시에, 화가의 마음속 감동과 대상의 본질을 아울러서 추상적으로 표현해 온 것이 실경산수화의 전통이다. 사물의 형상은 주로 점, 선, 면을 전이(轉移)해서 발달시킨 여러 가지의 준법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빛깔은 각각의 고유색을 낱낱이 고르기보다는 색의 근원인 먹색, 또는 몇 가지 기본 색으로 환원해서 나타낸다. 이때 원근법에 따른 공간의 깊이감마저도 추상화하여 화면 본래의 평면성을 회복시킨다면 더욱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수묵화의 추상화법이다. 먹과 붓과 종이라는 전통적 재료 용구를 사용하지만, 이처럼 산수 자연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표현한다면 여전히 현대성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구석기 시대의 그림에서도 현대성을 읽을 수 있고, 아프리카 조각에서도 현대성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본질 그것이 바로 현대성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림 7. <금강대>, 겸재 정선, 종이에 수묵담채, 22.0×28.8cm, 간송미술관
  위와 관련하여 겸재 정선의 <금강대(金剛臺)> 그림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것은 겸재 진경화법의 마무리 시기인 1755년 무렵에 그린 것으로, 그의 화법의 최종 경지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부벽수직준(斧劈垂直皴)과 절대준(折帶皴)을 찰법(攃法)에 가까운 굵은 붓질로 변용(變用)하여 섞어 쓰고 있다. 겸재 만년 특유의 대담한 필법인 것인데, 금강대를 층지고 모나게 그려놓고 그 주변을 마치 푸른 안개가 감싸듯이 담청(淡靑)의 쪽빛으로 훈염(暈染)해 놓고 있다. 모지고 층진 경골(硬骨)의 금강대를 몇 번 아닌 붓질로 실감나게 그려 낸 다음, 우리듯 피워 낸 발묵법(潑墨法)의 부드러운 묵점(墨點)들이 미가운림식米家雲林式으로 하단을 감싸게 하니 음양조화(陰陽調和)가 이토록 완벽할 수가 없다. 대상의 본질을 완벽하게 터득하여 그 정수만을 추출해 내고 그것을 종합하여 일필휘지(一筆揮之)하는 것이 동양화가 추구하는 구극의 경지임을 이 그림을 통해 실감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동양의 추상화(抽象畵)인 것이다.32)
 한편으로는, 현대인도 옛사람 못지않게 자연을 사랑한다. 휴일이면 산이나 골짜기에 들어가 즐거움과 휴식을 얻는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다. 물론 도회지 문명 속에서도 운동이나 오락을 즐길 수 있다. 그렇지만 자연 공간이 안겨다주는 즐거움에 비길 수는 없을 것이다. 산천은 유구한 것이지만 언제나 새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고전”이라고 한다.
  추상은 오히려 한 가지 매혹적인 가정이거나 개성적인 이해 방식인 것으로 여겨질 만하다. 정말로 아이러니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빨리 소통되고 감상자의 공감을 더 쉽게 산다는 점이다. 화가가 궁극적으로 이런 추상적 표현 방식을 선택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내적 질서와 생명감을 표현하는 효율적인 수단이 되는 셈이다. 이렇듯 추상능력은 상상력 내지는 추리력과 다르지 않을뿐더러, 창조력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32) 최완수, 『겸재 정선3』, 현암사, 2009. pp.4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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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시점의 시·공간

현대인의 관점에서 대상의 형태를 포착하는 방법 중 카메라 사진술은 꽤나 정밀한 착시(錯視)를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연구자의 입장에서 실경산수화를 그릴 때 현장사생을 고집하게 되는 것은 사진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사실성, 곧 리얼리티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공간을 표착하는 방식은 과학자의 실증(實證)과 다르다. 철학자의 사변(思辨)과도 다르다. 화가의 공간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인 공간이다. 추론이나 논증이 필요하지도 않다. 화가의 공간은 예술과의 직관과 깨달음에서 온다. 예술에서의 시간과 공간은 예술가의 마음속에 있고 마음속 시공간은 제한이 없고 무궁무진하다.29)

대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화가의 시점은 행동성을 갖는다. 이는 자연을 고정된 대상이 아닌 유동성을 갖는 생명체적 실체로 파악함을 의미한다. 유동성이 발휘되는 범위에서 그 존재는 맥락을 함축하게 되고, 그러한 맥락은 세계의 일부로서 확장성을 갖는다. 산수화에서 그러한 확장성이 드러나는 공간이 여백이다. 빈 공간, 없다는 것은 항상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떠한 존재의 부재(不在)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감상자에게 다른 어떠한 존재를 연상하게 하고 곧 그 맥락을 포함하는 세계로의 확장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확장은 단순히 그 대상의 공간적인 범주에 국한되지 않고 그러한 존재의 맥락, 더 나아가 그 본질에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확장성을 산수화에 담기 위해 화가는 그 대상의 순간적인 모습이 아닌 그 대상이 담고 있는 가능성, 이를테면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과 바위의 무거움, 냇물이 흘러가는 양태 같은 것들을 화폭에 담아내야 한다. 이는 고정된 시점, 원근법이 요구되는 일점투시(一點透視)에서는 미처 담아낼 수 없는 것으로, 산수화에서는 이를 위해 유동적인 다시점, 산점투시(散點透視)를 구축한다. 이러한 산점투시는 화가 자신을 주체로 삼는다. 소실점을 설정하고 원근법에 따라 대상을 묘사하는 일점투시와 달리, 그림의 주제에 따라 중심점을 관조자의 시선으로 설정하게 된다.

왕백민은 이러한 산점투시를 체계화, 보완하고자 일곱 가지 관찰법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는 걸음걸음마다 보는 방법, 두 번째로 여러 면을 보는 방법, 세 번째로 집중적으로 보는 방법, 네 번째로는 멀리 밀어서 보는 방법, 다섯 번째로 가까이 끌어당겨 보는 방법, 여섯 번째로 시점을 옮겨서 보는 방법, 그리고 일곱 번째가 6(六遠)30)을 결합시켜 보는 방법인데; 이러한 방법들은 모두 대상의 본질이라는 어떠한 추상을 화면에 옮기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31)


29)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박주은 역, 돌베개, 2013. pp.221~223

30)북송 곽희(郭熙)임천고치에서 제시된 고원(高遠), 심원(深遠), 평원(平遠)의 세 가지 원근 법과; 송 한졸(韓拙)산수순전집에 보이는 활원(闊遠), 미원(迷遠), 유원(幽遠)의 세 가지 원근법을 합하여 일컫는다.

韓拙 撰, 山水純全集, 中國畵論類編, 兪劍華 編著, 中華書局, 1973. p.662

31)왕백민, 동양화 구도론, 강관식 역, 미진사, 1991. p.198



3) 준법의 탄생

준법은 인물화에도 쓰이고 산수화에도 쓰인다. 인물에 걸쳐진 옷의 주름처럼 산수에서도 주름을 통해 여러 형상을 표현한다. 돌을 표현하면 석준(石皴)이고, 흙 언덕을 표현하면 토파준(土坡皴)이며, 나무를 표현하면 수지준(樹枝皴)이고, 물결을 표현하면 곧 수파준(水波皴)이다. 이렇듯 주름을 통해 형상을 표현하는 방법을 두고 준법이라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산석(山石)이나 토파(土坡)를 표현하는 데에서 명암(明暗)과 요철(凹凸) 따위를 통해 생김새를 나타내는 일종의 붓 터치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붓 터치는 물론 점, , 면의 추상 형식으로 드러난다. 이를테면 미점준(米點皴)같은 것은 점의 성격을 띠는 것이고, 피마준(披麻皴), 해삭준(解索皴), 난시준(亂柴皴) 같은 것들은 선의 성격을 지닌 것이며, 대벽부준(大劈斧皴)과 소부벽준(小劈斧皴)은 면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중국 역대의 화법에서 준의 창안은 작가가 살고 있던 지방의 자연 환경과 산세(山勢)에 따라 결정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북방화법과 남방화법에 얼마간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산수화는 산천이 결코 중국과 같지 아니한데도 이러한 중국의 화법을 모방적으로 끌어다 쓰면서 실경(實景)에 걸맞은 화법을 제대로 창출해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겸재 정선에 이르러서 진경산수 화법이 창안되니; 기존의 중국 산수화법을 차용하면서도 남북 양종의 화법을 한 화면에 아울러서 쓰고, 실제 경치에 부합되도록 음양의 이치를 따져서 창의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이제껏 산수화가 관념으로 흐르던 폐습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른바 서릿발 준으로 불리는 상악준(霜嶽㕙)을 창안하여 바위 봉우리의 삼엄한 골기(骨氣)를 나타내는가 하면 부드러운 토산(土山)을 그리는 데에는 미가준법(米家皴法)을 사용하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22)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화면에 실경으로서의 사실적 모습과 의경(意境)으로서의 추상적 모습을 동시에 나타낸 것인데, 준법이 곧 바로 묘사적 방법을 벗어난 추상화법인 까닭에 가능했던 일이다.

눈앞에 우뚝 솟아있는 화강암 봉우리를 바라보며 중생대 쥐라기에 굳어진 대보화강암23)의 생성 내력을 상상해 보는 것은 수묵화의 생동적인 표현을 위해 무척 이로울 수 있다. 희게 빛나는 바위 봉우리가 무려 15천만 년 동안의 기억을 가진 대상임을 마음속으로 느껴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경동성 요곡운동24)으로 지각이 솟구치고, 지층의 단절과 융기와 침강이 일어나고, 다시 침식과 풍화 작용으로 암석을 덮고 짓누르던 토층이 부서지고 씻기고 깎여 내려가 드디어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그 기나긴 형성 과정을 떠올려보자. 가슴 떨리는 감동으로 붓을 들고, 수직절리와 수평절리를 따라 생겨난 윤곽선과 주름 선을 망설임 없이 그어 내려가 보자. 겉모습이 아니라 내부의 힘을 느끼면서 마음껏 힘차고 자연스럽게 붓놀림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준법의 탄생이요, 수묵화의 추상이다.

준법에 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사람은 북송(北宋) 때의 산수화가 곽희(郭熙)이다. ‘()’()’을 구분하지 않았으나 ()’이라는 낱말을 최초로 문자화했다. 그의 저서 임천고치집(林泉高致集)에서 날카로운 붓을 옆으로 뉘어 끌면서 거두는 것을 준찰이라 한다.(以銳筆橫臥, 惹惹而取之, 謂之皴擦.)”고 한 것이 그것이다. 물론 그가 맨 처음으로 산수화에 준법을 사용했다는 말은 아니다. 준법이란 명칭은 명말 미술사가 진계유(陳繼儒 1558~1639)의 저서 니고록(妮古錄)에 처음 나타난다.26) 곽희는 조춘도(早春圖)(1072)에서 운두준(雲頭皴)과 피마준(披麻皴) 등을 사용하였다. 곽희에 앞서 동원(董源), 거연(巨然), 범관(范寬), 이성(李成)과 같은 화가들도 저마다 피마준, 운두준, 우점준(雨點皴) 등을 사용하여 산수화를 그렸다.

석도(石濤)는 자신의 저서 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畵語錄)』 「준법장제9(皴法章第九)에서 붓이 준을 창조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생동하는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산의 형상이 가지가지여서 그 생동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방법도 한 갈래로만 접근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산천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준을 예로 들면서, 모든 봉우리는 이름이 서로 다른 것처럼 그 형체가 기괴하거나 그 얼굴이 낯설거나 해서 천차만별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까닭에, 또한 준법도 스스로 구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27) 석도는 다음과 같은 13 가지의 준을 떠올려준다. 권운준(卷雲皴), 벽부준(劈斧皴), 피마준(披麻皴), 해삭준(解索皴), 귀면준(鬼面皴), 고루준(骷髏皴), 난시준(亂柴皴), 지마준(芝麻皴), 금벽준(金碧皴), 옥설준(玉屑皴), 탄와준(彈窩皴), 반두준(礬頭皴), 몰골준(沒骨皴)이 그것이다.28)


22)최완수 외, 진경시대2, 돌베개, 1998. p.66

23)한반도 중부의 옥천대 양쪽으로 널리 분포한 것으로 대보조산운동과 관련하여 형성된 쥐라기 화강암이다. 조산운동의 후기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암질은 대체로 흑운모화강섬록암이다.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 참고

24)산지를 이루는 지형이 한쪽은 높고 급한 면을 이루고, 다른 한쪽은 낮고 경사가 완만한 면을 이루는 지형을 경동성 지형이라 한다. 경동성 요곡운동이란 이러한 지형을 형성하는 요곡운동 을 말하며 이렇게 형성된 산지나 지형은 결과적으로 좌·우 비대칭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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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단면의 모양이 육각형, 오각형 등 다각형으로 긴 기둥 모양을 이루고 있는 절리를 말한다. 화 산암 암맥이나 용암, 용결응회암 등에서 생긴다. 제주도 해안에는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가 절 벽을 이루고 있으며, 정방폭포와 천지연폭포가 이런 지형에 형성된 폭포이다. 수평과 수직이 있다.

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참고

26)허영환, 중구회화의 이해, 열화당, 1971. pp.100, 101

27)김용옥, 석도화론, 통나무, 1992. p.118

28)김용옥, 위의 책, p.117





2) 고법과 사생

법고창신이라는 말이 있다.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낸다는 뜻이다. 창조적 행위란 곧 전통과 현대의 새로운 방식이 상호 조화를 이루게 됨을 말한다. 조각가 우성(又誠) 김종영(金鍾瑛, 1915~1982)이 말했듯이, ‘전통을 단순한 전승이나 반복의 뜻이 아니라, 끊임없는 탄생과 새로운 인격의 형성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19) 그러므로 고법은 어디까지나 현재진행형일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석도의 대척자제화시발1산수편에서는 내가 나 됨은 스스로 내가 존재함에 있다. 고인의 수염과 눈썹이 내 얼굴에 생겨날 수 없고 고인의 폐부(肺腑)가 나의 배 속에 들어 올 수 없다.” 라고 했다.20) 고법을 익혀 전통의 흔들림 없는 가치와 정신을 익혀야 한다. 이렇듯 연구자는 끝없는 창신(創新)의 길을 따라 자연의 신비로움을 고스란히 소박한 마음으로 담고 싶다. 고법을 충실히 알고 나면 구속을 벗어나 자유롭고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고법을 익혀서 얻은 지혜로운 방법을 현장사생에서 실천해 보는 새로운 시도라고 본다. 처음에는 껍데기만 모방하는 데에 그쳐도 마음이 벅찼다. 그것만이라도 아름다운 자연의 모방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자연을 묘사적인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굳이 현장사생이 아니더라도 감정이 없는 카메라 렌즈의 시점과 시각으로도 얼마든지 실행할 수 있는 일이다. 실경을 현장에서 그린다는 것은 기()를 파악하여 그린다는 것이다. 산들은 각기 자기의 형세를 가지고 있다. 산수와 마주보고, 산을 올라가서 보고, 산의 면면을 보고, 또 지질학적 형질도 파악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고법은 수없이 많은 이름을 가지고 전해지고 있다. 더러는 현장에서조차 실제의 산수의 형태와 상관없이 다만 전해오는 준법의 이름을 먼저 떠올린다. 물론 사생 기법은 앞서 말한 고법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러나 과연 눈앞의 실경이 그러한 준법과 딱 맞아떨어질까? 비록 어떠한 준법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막상 산수를 직접 대하고 있을 때 그러한 준법이 소용될지를 굳이 상관하지는 않는다. 다만 연구자 앞에 있는 실경의 산과 바위 등 여러 형세를 파악한 뒤 마음속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할 뿐이다. 곧 처음 붓놀림을 할 때의 획이 그 그림의 준법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준법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모든 자연의 조건과 관련하여 연구자의 마음과 자연의 이치가 정하는 것이다. 이때 지필묵이 어떻게 갖추어져 있는가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석도(石濤, 1641~1720)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畫語錄』 「일획 장제1 一畫章第一에서 이렇게 말한다. “화법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그것은 일획에서 생겨난다. 일획이라는 것은 뭇 존재의 밑동이요, 온 모양의 뿌리이다. 그 작용은 오묘한 신의 세계에서는 잘 들어나지만 통속적인 인간의 인식 앞에서는 감추어진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일획의 위대함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말은 일획을 우주론적 본체로 파악하는 형이상학적 견해를 말하고 있다. 예술가가 긋는 단 하나의 획은, 그 스스로가 체득한 우주적 정신에서 파생되기 때문에, 필시 만유(萬有)를 낳는 절대적 권능을 가진 일획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또한 그에 예술전체가 포섭되고 막힘이 없이 두루 통하는 일획이다.21)

이것이 바로 개성적 화법의 탄생과정이다. 그러므로 사생에 앞서 화면에 사물을 옮기기 위해서는 철저한 관찰과 본질 체득이 필요하다. 화구를 챙겨 설레는 마음으로 명승지나 산수를 찾아간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그 즐거움에 젖어들게 된다. 그리하여 마음을 맑게 하여 형상의 안팎을 음미하고 고요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경물의 특징과 총체성이 반복해서 관찰되고 교감이 이루어진다. 그때 비로소 점, , 면의 추상 요소가 눈앞에 떠오르고 필획의 운율이 살아나게 된다.

19)김종영,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 열화당, 1983. p.56

20)葛路 著, 姜寬植 譯,中國繪畫理論史, 미진사, 1989. p.428

21)김용옥, 석도화론, 통나무, 1992. pp.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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