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다시점의 시·공간
현대인의 관점에서 대상의 형태를 포착하는 방법 중 카메라 사진술은 꽤나 정밀한 착시(錯視)를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연구자의 입장에서 실경산수화를 그릴 때 현장사생을 고집하게 되는 것은 사진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사실성, 곧 리얼리티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공간을 표착하는 방식은 과학자의 실증(實證)과 다르다. 철학자의 사변(思辨)과도 다르다. 화가의 공간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인 공간이다. 추론이나 논증이 필요하지도 않다. 화가의 공간은 예술과의 직관과 깨달음에서 온다. 예술에서의 시간과 공간은 예술가의 마음속에 있고 마음속 시∙공간은 제한이 없고 무궁무진하다.29)
대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화가의 시점은 행동성을 갖는다. 이는 자연을 고정된 대상이 아닌 유동성을 갖는 생명체적 실체로 파악함을 의미한다. 유동성이 발휘되는 범위에서 그 존재는 맥락을 함축하게 되고, 그러한 맥락은 세계의 일부로서 확장성을 갖는다. 산수화에서 그러한 확장성이 드러나는 공간이 여백이다. 빈 공간, 없다는 것은 항상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떠한 존재의 부재(不在)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감상자에게 다른 어떠한 존재를 연상하게 하고 곧 그 맥락을 포함하는 세계로의 확장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확장은 단순히 그 대상의 공간적인 범주에 국한되지 않고 그러한 존재의 맥락, 더 나아가 그 본질에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확장성을 산수화에 담기 위해 화가는 그 대상의 순간적인 모습이 아닌 그 대상이 담고 있는 가능성, 이를테면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과 바위의 무거움, 냇물이 흘러가는 양태 같은 것들을 화폭에 담아내야 한다. 이는 고정된 시점, 원근법이 요구되는 일점투시(一點透視)에서는 미처 담아낼 수 없는 것으로, 산수화에서는 이를 위해 유동적인 다시점, 산점투시(散點透視)를 구축한다. 이러한 산점투시는 화가 자신을 주체로 삼는다. 소실점을 설정하고 원근법에 따라 대상을 묘사하는 일점투시와 달리, 그림의 주제에 따라 중심점을 관조자의 시선으로 설정하게 된다.
왕백민은 이러한 산점투시를 체계화, 보완하고자 일곱 가지 관찰법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는 걸음걸음마다 보는 방법, 두 번째로 여러 면을 보는 방법, 세 번째로 집중적으로 보는 방법, 네 번째로는 멀리 밀어서 보는 방법, 다섯 번째로 가까이 끌어당겨 보는 방법, 여섯 번째로 시점을 옮겨서 보는 방법, 그리고 일곱 번째가 6원(六遠)30)을 결합시켜 보는 방법인데; 이러한 방법들은 모두 대상의 본질이라는 어떠한 추상을 화면에 옮기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31)
29)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박주은 역, 돌베개, 2013. pp.221~223
30)북송 곽희(郭熙)의 『임천고치』에서 제시된 고원(高遠), 심원(深遠), 평원(平遠)의 세 가지 원근 법과; 송 한졸(韓拙)의 『산수순전집』에 보이는 활원(闊遠), 미원(迷遠), 유원(幽遠)의 세 가지 원근법을 합하여 일컫는다.
韓拙 撰, 「山水純全集」, 『中國畵論類編』, 兪劍華 編著, 中華書局, 1973. p.662
31)왕백민, 『동양화 구도론』, 강관식 역, 미진사, 1991.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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