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맺음말
실경산수화는 관념산수화의 대개념으로, 우리나라 산수 경치의 자연미를 우리의 시각과 우리의 화법으로 표현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조선후기 겸재 정선에 의해 창시된 진경산수화는, 실경(實景)에서 읽어낸 이치와 감동을 화가의 마음속 의경(意境)으로 승화시켜 그려낸 그림이다. 곧 산수에서 아름다운 형상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산수의 도(道)와 정신을 아울러 바라보는 태도인 것이다. 진경산수 화풍은 겸재 정선의 다음 세대인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 표암 강세황 같은 개성적인 문인화가들에게 이어지고, 단원 김홍도에 의해 더욱 세련된 화풍으로 다듬어진다. 실경산수화의 이러한 전통과 예술적 성과는 오늘날에도 한국미술사의 자랑거리로 남아있다.
옛 화가들이 자연 산천을 유람하고,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거기에는 아름다운 산천을 즐기고자 했던 것이, 어쩌면 그 안에는 임천을 그리워하는 뭇 사람의 마음이 깃들어 있었을지 모른다. 흔히들 산에서 노닐다 오면 산의 기를 받아 몸에도 기운이 솟구친다고 한다. 이렇듯 연구자는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화폭에 담아 감상자로 하여금 산천에 들어와 있는 듯이 마음의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싶다. 마치 한 곡의 멋진 음악을 듣고 기분전환이 되어 행복감이 생기듯이 말이다. 이런 그림이 되도록 하려면 현장 사생을 통해 생동감 있는 표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마음을 화폭에 충실히 담기 위해 그 자연의 이치, 화육(化育)의 이치를 연구하고 현장의 특색에 맞는 준법을 탐구해 내고자 했다. 선대의 화가들이 각 주변 산천에 맞는 준법을 창안하였음은, 또 오늘날의 화가들이 그것을 본받아 따름은 이러한 바이다.
산수화의 준법(皴法), 곧 추상화된 표현법의 연구를 시작하고 보니, 연구자가 종전에 사용하던 방법대로 풍경 사진의 이미지를 묘사하는 수법이 얼마나 실질에 부합되지 않는지를 알게 되었다. 카메라로 찍은 사진 이미지가 곧 바로 ‘객관적 사실’을 담보하는 줄로 알았었지만, 그것은 다만 왜곡된 착시현상에 불과할 뿐, 결코 체험으로 받아들인 감동이나 박진감이 거기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여기에서 표현법의 한계를 스스로 느끼게 되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산수화가 도리어 조선후기 진경산수에 비해 퇴행적이고 진부한 느낌을 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대상물의 겉모습만 묘사하여 생동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풀고자 한 것이 이 연구로 이어졌다.
전통의 화법을 참고하는 대신 기존의 투시 원근법과 명암법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서, 현대성이 멀리 있지 않음을, 어쩌면 옛것 또한 어떤 의미로는 현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 안에서는 고법을 연구하고, 바깥으로는 미개척의 새로운 준법을 연구하며 그 앎을 현실로 옮기고자 현장 사생에 임하였다. 가는 곳마다 암석의 특징을 관찰하고 준의 형태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이른바 점, 선, 면의 추상 요소로 환원하여, 현지의 형세에 들어맞는 또 다른 형태의 준법을 골라내보고자 하였다.
이렇듯 실경을 추상적으로 해석해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 과정에서 처음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설령 아직 여러 준법을 충분히 개척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이러한 노력은 그 자체로 보람이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의 연구에서 한계를 느끼기도 하였지만, 연구자는 이 주제를 통해 실경산수화의 의의를 한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현장에서 느끼는 감동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고, 같은 장소라도 자연과 마주할 때마다 감동이 또한 다르게 찾아오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연구의 시작 시점보다 더 많은 과제를 한 아름 안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현장 사생에서 성과를 얻지 못한 때도 많았고, 좋지 못한 기상 여건과 같은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곤란을 겪은 적도 있었다. 다만 누군가 말했듯이 잃는 것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었을 것이다. 자연과의 승부, 대체로 사람의 일이 그렇듯 십중팔구 마음먹은 대로 되지만은 않아도, 현장 사생에는 그러한 역경마저 즐기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자연과의 교감에서 오는 편안한 마음의 휴식을 누리고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연 환경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와 부지불식간에 변하는 풍경들, 그런 것들이 살아있는 자연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자연이 살아있기에 이른바 삼라만상, 아름다운 산수 자연의 다양한 모습을 화폭 속에 담아낼 수 있게 될 마련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