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현장 사생
1) 감동과 몰입
조선 후기 최북은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을 구경하고 황홀한 경치에 감탄하여 “천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 하고 외치면서 구룡연에 뛰어들었다 한다. 다행히 그를 구해 주는 사람이 있어 죽지는 않았다고 하나 그 경치는 목숨을 던져도 아깝지 않을 만큼 빼어났으리라. 상상을 초월하는 금강산의 절경은 산수를 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 가보고 싶은 곳일 것이다. 이렇듯 아름다운 산수는 감상자의 정신을 빼앗는가 보다.
그러한 감동은 일상에서의 탈피와 자연과의 교감에서 오는 것이다. 즉, 자연을 마주하지 않고서는 맛볼 수 없는 즐거움이다. 현장사생에서는 그 자연을 마주하고 화폭에 생생하게 담을 수 있어 좋다. 실내에서 맛볼 수 없는 바깥의 경치는 화가를 감동에 빠지게 하고 흥취와 즐거움, 그리고 삶의 활력을 가져다준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그저 바라보이는 것 이상으로 더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실경에 감동을 받았다면 비록 붓을 들지 않았어도 마음속에 이미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곳을 쉽게 만날 수는 없다. 멋진 실경이 어디에나 흔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차한 다음에 화구를 메고 마음에 드는 장소까지 걷거나 등반을 해야 한다. 때론 신발을 벗고 물을 건너야 하는 곳도 있다. 좋은 경치를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어려움은 늘 각오한다.
연구자는 가송리 농암문학관으로 가는 길 전망대에서 가을 풍광을 보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붓을 들 생각은 하지 않고 멍하니 경치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울긋불긋 단풍이 든 웅장한 산은 흰 구름으로 허리에 치마를 두른 듯하고, 유유히 강물이 흐르는 포근하고 아늑한 시골의 들녘에는 가을 곡식으로 넉넉하다. 무슨 연유인지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진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니 스스로 놀라 쓸쓸함까지 밀려온다. 파란 하늘은 아득하고 고운 색채에 눈이 부신다.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이미 가을이라는 계절이 와서 산천을 온통 예쁜 물감으로 칠하여 놓았다. 다른 날에 오면 더 진하게 칠해 놓을 것이다. 얼른 이 가을의 풍정을 쫒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감정을 꾸역꾸역 추스르고 화폭에 붓을 들이댄다. “이렇게 그려야한다. 저렇게 그려야 한다.”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붓 가는 대로 감동의 물결을 따라 붓을 놀린다. 해는 쉬지 않고 뉘엿뉘엿 갈 길을 가고, 그림에 몰두해 있는 동안 미처 시간 가는 줄도 어두워지는 줄도 모른다. 산속의 어둠은 빠르다. 그제야 산속에 혼자인 것을 알아차리고 주섬주섬 화구를 챙긴다. 그리고 며칠 후 그때 다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다시 그곳을 찾았다. 차에 있어야 할 화구가방이 안 보인다. 어두워지는 줄 모르고 몰입한 그날, 어둠 속에 그만 화구가 묻혀 보이지 않았는지 차에 싣지 않았던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현장사생에 몰입해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보물과 같은 화구 가방을 잃어버린 날이었다.
해의반박(解衣槃礡)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송나라의 왕 원군(元君)이 널리 화공을 초청하여 그림 대회를 주관할 때 늦게 도착한 한 화공이 홀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옷을 풀어헤지고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화가로서의 느긋한 자세에 감탄한 일화를 일컫는 성어이다. 이러한 고사에는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취해야 할 바람직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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