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준법의 탄생
준법은 인물화에도 쓰이고 산수화에도 쓰인다. 인물에 걸쳐진 옷의 주름처럼 산수에서도 주름을 통해 여러 형상을 표현한다. 돌을 표현하면 석준(石皴)이고, 흙 언덕을 표현하면 토파준(土坡皴)이며, 나무를 표현하면 수지준(樹枝皴)이고, 물결을 표현하면 곧 수파준(水波皴)이다. 이렇듯 주름을 통해 형상을 표현하는 방법을 두고 준법이라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산석(山石)이나 토파(土坡)를 표현하는 데에서 명암(明暗)과 요철(凹凸) 따위를 통해 생김새를 나타내는 일종의 붓 터치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붓 터치는 물론 점, 선, 면의 추상 형식으로 드러난다. 이를테면 미점준(米點皴)같은 것은 점의 성격을 띠는 것이고, 피마준(披麻皴), 해삭준(解索皴), 난시준(亂柴皴) 같은 것들은 선의 성격을 지닌 것이며, 대벽부준(大劈斧皴)과 소부벽준(小劈斧皴)은 면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중국 역대의 화법에서 준의 창안은 작가가 살고 있던 지방의 자연 환경과 산세(山勢)에 따라 결정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북방화법과 남방화법에 얼마간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산수화는 산천이 결코 중국과 같지 아니한데도 이러한 중국의 화법을 모방적으로 끌어다 쓰면서 실경(實景)에 걸맞은 화법을 제대로 창출해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겸재 정선에 이르러서 진경산수 화법이 창안되니; 기존의 중국 산수화법을 차용하면서도 남∙북 양종의 화법을 한 화면에 아울러서 쓰고, 실제 경치에 부합되도록 음양의 이치를 따져서 창의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이제껏 산수화가 관념으로 흐르던 폐습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른바 서릿발 준으로 불리는 상악준(霜嶽㕙)을 창안하여 바위 봉우리의 삼엄한 골기(骨氣)를 나타내는가 하면 부드러운 토산(土山)을 그리는 데에는 미가준법(米家皴法)을 사용하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22)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화면에 실경으로서의 사실적 모습과 의경(意境)으로서의 추상적 모습을 동시에 나타낸 것인데, 준법이 곧 바로 묘사적 방법을 벗어난 추상화법인 까닭에 가능했던 일이다.
눈앞에 우뚝 솟아있는 화강암 봉우리를 바라보며 중생대 쥐라기에 굳어진 대보화강암23)의 생성 내력을 상상해 보는 것은 수묵화의 생동적인 표현을 위해 무척 이로울 수 있다. 희게 빛나는 바위 봉우리가 무려 1억5천만 년 동안의 기억을 가진 대상임을 마음속으로 느껴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경동성 요곡운동24)으로 지각이 솟구치고, 지층의 단절과 융기와 침강이 일어나고, 다시 침식과 풍화 작용으로 암석을 덮고 짓누르던 토층이 부서지고 씻기고 깎여 내려가 드디어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그 기나긴 형성 과정을 떠올려보자. 가슴 떨리는 감동으로 붓을 들고, 수직절리와 수평절리를 따라 생겨난 윤곽선과 주름 선을 망설임 없이 그어 내려가 보자. 겉모습이 아니라 내부의 힘을 느끼면서 마음껏 힘차고 자연스럽게 붓놀림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준법의 탄생이요, 수묵화의 추상이다.
준법에 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사람은 북송(北宋) 때의 산수화가 곽희(郭熙)이다. ‘준(皴)’과 ‘찰(擦)’을 구분하지 않았으나 ‘준(皴)’이라는 낱말을 최초로 문자화했다. 그의 저서 『임천고치집(林泉高致集)』에서 “날카로운 붓을 옆으로 뉘어 끌면서 거두는 것을 준찰이라 한다.(以銳筆橫臥, 惹惹而取之, 謂之皴擦.)”고 한 것이 그것이다. 물론 그가 맨 처음으로 산수화에 준법을 사용했다는 말은 아니다. 준법이란 명칭은 명말 미술사가 진계유(陳繼儒 1558~1639)의 저서 『니고록(妮古錄)』에 처음 나타난다.26) 곽희는 「조춘도(早春圖)」(1072)에서 운두준(雲頭皴)과 피마준(披麻皴) 등을 사용하였다. 곽희에 앞서 동원(董源), 거연(巨然), 범관(范寬), 이성(李成)과 같은 화가들도 저마다 피마준, 운두준, 우점준(雨點皴) 등을 사용하여 산수화를 그렸다.
석도(石濤)는 자신의 저서 『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畵語錄)』 「준법장제9(皴法章第九)」에서 붓이 준을 창조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생동하는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산의 형상이 가지가지여서 그 생동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방법도 한 갈래로만 접근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산천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준을 예로 들면서, 모든 봉우리는 이름이 서로 다른 것처럼 그 형체가 기괴하거나 그 얼굴이 낯설거나 해서 천차만별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까닭에, 또한 준법도 스스로 구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27) 석도는 다음과 같은 13 가지의 준을 떠올려준다. 권운준(卷雲皴), 벽부준(劈斧皴), 피마준(披麻皴), 해삭준(解索皴), 귀면준(鬼面皴), 고루준(骷髏皴), 난시준(亂柴皴), 지마준(芝麻皴), 금벽준(金碧皴), 옥설준(玉屑皴), 탄와준(彈窩皴), 반두준(礬頭皴), 몰골준(沒骨皴)이 그것이다.28)
22)최완수 외, 『진경시대2』, 돌베개, 1998. p.66
23)한반도 중부의 옥천대 양쪽으로 널리 분포한 것으로 대보조산운동과 관련하여 형성된 쥐라기 화강암이다. 조산운동의 후기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암질은 대체로 흑운모화강섬록암이다.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 참고
24)산지를 이루는 지형이 한쪽은 높고 급한 면을 이루고, 다른 한쪽은 낮고 경사가 완만한 면을 이루는 지형을 경동성 지형이라 한다. 경동성 요곡운동이란 이러한 지형을 형성하는 요곡운동 을 말하며 이렇게 형성된 산지나 지형은 결과적으로 좌·우 비대칭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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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단면의 모양이 육각형, 오각형 등 다각형으로 긴 기둥 모양을 이루고 있는 절리를 말한다. 화 산암 암맥이나 용암, 용결응회암 등에서 생긴다. 제주도 해안에는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가 절 벽을 이루고 있으며, 정방폭포와 천지연폭포가 이런 지형에 형성된 폭포이다. 수평과 수직이 있다.
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참고
26)허영환, 『중구회화의 이해』, 열화당, 1971. pp.100, 101
27)김용옥, 『석도화론』, 통나무, 1992. p.118
28)김용옥, 위의 책, p.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