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본인 작품의 성격과 의미

  자연스럽다는 것은 그 대상이 부자연스럽지 않은 것, 곧 처음 볼지라도 낯설지 않고 편안하다는 의미이다. 임천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이러한 편안함을 담보로 한다. 산천을 마주할 때의 편안함은 현대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연을 찾게 하고, 또 화가로 하여금 산수를 화폭에 담아낼 것을 갈망하게 한다. 본인의 작품들은 이형사신의 사실정신에 입각하여 우리의 실경을 새롭게 표현함으로써 그러한 갈망을 풀어내고자 한 결과물이다.


  작품 1

작품 1. <맹개마을의 여름>, 118.0×91.0cm, 한지 수묵담채, 2016.
  안동시 도산면 청량산 자락에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퇴계 이황이 극찬한 ‘예뎐길’이 있다. 퇴계 이황이 도산서원과 청량산을 오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중턱에서 내려다보이는 ‘맹개마을’이 그림 같이 수려한 풍광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청량산이 보이고 강이 굽이쳐 흐른다. 조선의 선비라면 한번쯤 걸어보고 산수를 즐기고 진경시를 읊었을 법한 길이라 생각이 든다. 녹음이 짙은 여름날 싱그러운 자연은 흥치(興致)가 절로 난다. 그 흥을 연결시켜 여름 숲을 율동감 있게 표현하려 했다. 멀리 청량산은 대기원근법을 사용하여 안개처리로 생동감을 주고자 하였다. 가까이에 있는 수목들과 산들도 변화감 있게 표현해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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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융통성 있는 경영위치

구도는 화면 위에 미적 효과를 얻기 위하여 대상을 조직하고 배치하는 것이다. 구도를 위한 구도는 필연적으로 형식주의에 빠지므로, 구도는 주제의 내용을 벗어나지 않고 그 요구에 따라야 한다. 남제(南齊)의 사혁(謝赫, 479~502)이 제시한 화6(畵六法) 중 다섯 번째, 곧 경영위치가 구도를 뜻한다. 37)

이즈음의 산수화는 카메라의 사진 이미지가 실제의 이미지와는 알게 모르게 다른 모습으로 왜곡된다는 사실을 지나쳐 버리고, 카메라 시각의 일점투시법을 사용하여 화면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원근법을 사용하여 카메라 시각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 구도는 전통적인 사실정신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실경산수화의 공간구도는 예로부터 다시점이 적용되었다. 거기에는 무엇보다 의경(意境)이라는 추상적인 힘이 내부에서 작용하고 있는 까닭이다. 화면의 공간구성은 그러한 내적 필연성을 따라 이행되는 것일 뿐, 미리부터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은 실상 아무 것도 없다.

구도를 잡는 방법에는 우선 취함[]과 버림[]이 있다. 취함과 버림은 구도를 잡을 때 불필요한 것은 없애고 필요한 내용만을 잘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에 있어 객관적 존재의 말살이나 왜곡이 아닌 실제에 근거하여 중요한 부분은 취하고 군더더기는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현장에서 자연과 마주 앉으며 종종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 번잡하여 무엇을 버려야 하고 어디까지 취해야 하는지 어려움에 부딪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다시금 대상에 대해 먼저 주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동반자격인 객()을 살펴본다. 여기서 파악된 주와 객은 서로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다음으로, 구도에서 객은 있으나 주가 그 중심을 잡지 않으면 그림이 산만해 지고, 주는 있으나 옆에서 받쳐 주는 객이 없다면 단조롭고 변화가 없다. 그 밖에 주와 객이 대신할 수 없는 부차적인 볼거리 또한 하나의 요소이다. 연구자의 그림에서 예를 들면, 가송리의 전경을 그린 작품에서 농촌의 전경으로 제시된 경운기, 트랙터, 시골집, 비닐하우스 등이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주와 객 사이에는 대소 관계가 성립한다. 대체적으로 가까이 있는 산이 주로서 형태가 크고, 멀리 있는 산은 작아 객으로 작용한다. 다만 구도에서 큰 것이 주이기는 하지만 객이 될 수도 있는데, 이러한 변화를 줌에 있어서는 주제와 내용, 그리고 실제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구도를 처리하여야 한다.

한편으로, 구도를 달리 말해 치진포세(置陳布勢)’라 하였는데 이는 구도에서는 ()’가 중요함을 뜻한다. 이것은 곧 구도를 잡을 때 세가 형상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깨우쳐주는 말이다. 산을 그리되 그 기세가 부족하면 무미건조하게 될 것이다. 무릇 형상의 기세를 잘 표현하여야 실재성 있는 작품이 되고 그림은 생동감을 얻게 된다. 산의 기세는 서로 호응관계가 있어야 한다. 화면 속의 경치가 서로 고립되어서는 아니 되고 형상 간에 전후좌우의 연관성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연관성에 있어서는 또한 그림 안에서의 호응 관계뿐만 아니라, 여백을 통해 무한한 밖의 공간까지 연장시키는 그림 밖의 호응도 고려해야 한다.

여백은 화면에 연속성을 주어 그 답답함을 없애고 생동감을 준다. 여백과 실()은 상대적 개념으로, 여백이 있으므로 인해 실이 더욱 잘 표현되기도 하고, 반대로 실은 여백으로 인해 더욱 두드러지는 수도 있다. 산수에서 강물의 표현은 일필을 보태지 않아도 물로 인식된다는 특성으로 인해 그 빈 공간은 실이다. 여백을 남기는 것은 그러한 공간을 구성하는 것만으로도 예술적 표현에 있어서 특수한 표현방법으로 기능할 수 있다. 여백을 남김으로 인해 더욱 의경(意境)을 확대시켜 줄 수 있다. 38)

모름지기 산수화의 구도에 있어서는 성김과 빽빽함, 긴장과 이완, 마름과 젖음, 강한 곳과 부드러운 곳 등의 적절한 배치와 구성이 화면을 조화롭게 만든다. 따라서 음악을 들을 때도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 빠른 소리와 느린 소리, 긴장되는 곳과 느슨한 곳이 있듯이, 그림의 화면 속에서도 이런 것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37)왕백민, 동양화 구도론, 강관식 역, 미진사, 1991. pp.6,7

38)왕백민, 동양화구도론, 강관식 옮김, 미진사, 199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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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운필의 자유로움

필묵법이란 붓과 먹으로 그 대상을 화면에 표현하는 방법이다. 종이 위에 그어진 필획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명체이며 음악의 음표처럼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필획은 붓과 먹을 사용하여 그은 획이다. 곧 필묵의 흔적이다. 그 흔적을 통해서 형상을 표현한다. 먹을 사용하는 묵법으로는 먹물의 농담과 양을 조절하여 다양한 분위기를 표출할 수 있다. 충실 공간을 이루는 필획의 기와 빈공간의 기가 합쳐져서 감상자로 하여금 큰 울림을 받게 한다.

35)

석도화론 일획 장제1에 나오는 말이다. 화가가 능히 그 한번 그음으로써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전체를 포용하면서 그 좁은 캔버스에 그것을 압축하여 구현할 수 있다면, 그 화가의 의식에 의도성이 명료해질 것이며, 따라서 그 붓질도 투철해 질 것이다. 그러나 그 붓을 든 팔뚝이 허령하여 자유자재하지 못하면 곧 그 그림은 엉터리가 되어 버린다. 또 변증법적으로 그 그림이 엉터리가 되어 가면 따라서 팔뚝의 영기를 잃어간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그림의 생동감을 주기 위해서는 붓을 굴리며, 그림에 안정감을 주기위해서는 붓을 느긋하게 크게, 구애됨이 없이 움직인다.36)

현장사생에서 마음이 산수와 일체가 되면, 그 즐거움으로 인해 붓이라는 수단을 잊어버리고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붓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면서 운필의 자유를 얻게 된다. 앉은 자리에서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흥에 몸과 마음을 내맡긴다. 이제 손에 붓을 들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점, , 면의 추상화된 필획을 마음껏 자유롭게 구사(驅使)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

장자는 이것을 두고 득어망전(得魚忘筌)이라 했다.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버린다는 말이다. 뜻한 바를 이루고 나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썼던 수단에 대하여는 애착을 갖지 말고 잊어버리라는 말이다. 세상사의 이치도 마찬가지로 그 이치를 잘 알면 도리어 세상 속에서 자유로이 될 것이다. 획 또한 획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 획에 이끌러 다닌다. 한 획의 이치를 제대로 알고 난 뒤에는 붓과 먹의 구속으로부터 풀려나와서 형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35)박덕준, “필묵법의 5단계 서법의 체계화입법국정전문지 The Leader, 201610월호, pp. 42~44

36)김용옥, 석도화론, 통나무, 1992. p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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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현장 사생

1) 감동과 몰입

조선 후기 최북은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을 구경하고 황홀한 경치에 감탄하여 천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 하고 외치면서 구룡연에 뛰어들었다 한다. 다행히 그를 구해 주는 사람이 있어 죽지는 않았다고 하나 그 경치는 목숨을 던져도 아깝지 않을 만큼 빼어났으리라. 상상을 초월하는 금강산의 절경은 산수를 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 가보고 싶은 곳일 것이다. 이렇듯 아름다운 산수는 감상자의 정신을 빼앗는가 보다.

그러한 감동은 일상에서의 탈피와 자연과의 교감에서 오는 것이다. , 자연을 마주하지 않고서는 맛볼 수 없는 즐거움이다. 현장사생에서는 그 자연을 마주하고 화폭에 생생하게 담을 수 있어 좋다. 실내에서 맛볼 수 없는 바깥의 경치는 화가를 감동에 빠지게 하고 흥취와 즐거움, 그리고 삶의 활력을 가져다준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그저 바라보이는 것 이상으로 더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실경에 감동을 받았다면 비록 붓을 들지 않았어도 마음속에 이미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곳을 쉽게 만날 수는 없다. 멋진 실경이 어디에나 흔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차한 다음에 화구를 메고 마음에 드는 장소까지 걷거나 등반을 해야 한다. 때론 신발을 벗고 물을 건너야 하는 곳도 있다. 좋은 경치를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어려움은 늘 각오한다.

연구자는 가송리 농암문학관으로 가는 길 전망대에서 가을 풍광을 보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붓을 들 생각은 하지 않고 멍하니 경치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울긋불긋 단풍이 든 웅장한 산은 흰 구름으로 허리에 치마를 두른 듯하고, 유유히 강물이 흐르는 포근하고 아늑한 시골의 들녘에는 가을 곡식으로 넉넉하다. 무슨 연유인지 가슴이 하고 떨어진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니 스스로 놀라 쓸쓸함까지 밀려온다. 파란 하늘은 아득하고 고운 색채에 눈이 부신다.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이미 가을이라는 계절이 와서 산천을 온통 예쁜 물감으로 칠하여 놓았다. 다른 날에 오면 더 진하게 칠해 놓을 것이다. 얼른 이 가을의 풍정을 쫒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감정을 꾸역꾸역 추스르고 화폭에 붓을 들이댄다. “이렇게 그려야한다. 저렇게 그려야 한다.”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붓 가는 대로 감동의 물결을 따라 붓을 놀린다. 해는 쉬지 않고 뉘엿뉘엿 갈 길을 가고, 그림에 몰두해 있는 동안 미처 시간 가는 줄도 어두워지는 줄도 모른다. 산속의 어둠은 빠르다. 그제야 산속에 혼자인 것을 알아차리고 주섬주섬 화구를 챙긴다. 그리고 며칠 후 그때 다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다시 그곳을 찾았다. 차에 있어야 할 화구가방이 안 보인다. 어두워지는 줄 모르고 몰입한 그날, 어둠 속에 그만 화구가 묻혀 보이지 않았는지 차에 싣지 않았던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현장사생에 몰입해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보물과 같은 화구 가방을 잃어버린 날이었다.

해의반박(解衣槃礡)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송나라의 왕 원군(元君)이 널리 화공을 초청하여 그림 대회를 주관할 때 늦게 도착한 한 화공이 홀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옷을 풀어헤지고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화가로서의 느긋한 자세에 감탄한 일화를 일컫는 성어이다. 이러한 고사에는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취해야 할 바람직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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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점. 선. 면
  회화 예술에 있어서 점, 선, 면은 그 기본적 표현 요소이자 매체이다. 그럼에도 이것 자체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존재자일 따름이다. 점은 이웃하는 점들과의 관계 등에 따라 공간감, 형태나 움직임을 나타낸다. 점들의 간격이 좁고 넓음에 따라 수축된 느낌과 느리고 이완된 느낌을 주고, 점의 크기를 점차 줄이거나 늘임으로써 운동감이나 공간감을 주기도 한다. 이 외에도 점은 산수화에서 의미와 감정을 표현하는 데 다양하게 활용되는 요소이다.
  선은 어떠한 추상 관념을 시각화한 ‘획(畫)’으로 나타난다. 선은 동양화의 주된 재료인 먹의 특성 때문에 그 비중은 가히 동양화를 ‘선의 예술’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산수화 준법에 있어 선은 형태, 질감, 양감, 원근감, 운동감, 생명력, 정신성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 수단이다. 면은 선이 합쳐져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림 . <필운대>, 겸재 정선, 1753경, 종이에 수묵담채, 29.5 x 33.7 cm. 간송미술관
 부벽준과 같이 폭이 있는 획에서 단번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내용이 드러나는 예는 무수히 많다. 가까운 예를 하나 들어서, 겸재 정선이 1753년 무렵에 그린 <필운대(弼雲臺)> 그림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겸재 정선이 1753년 무렵에 그린 것으로, 이곳 인왕산 필운대 아래에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종로구 필운동 88번지 일대로 현재 배화여고가 들어서 있는 자리다. 겸재는 이 경치를 어느 시원한 여름날 화폭에 올린 듯한데, 뒤편 인왕산 봉우리를 거의 생략해 버리고 낮은 구릉만 태점(苔點)과 흐린 윤곽선으로 간결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2단으로 된 필운대의 석대상(石臺狀)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상단 뒤 석벽 아래는 노송림(老松林)으로 병풍을 둘러 석벽을 가려 놓았다. 대담한 청묵선염법(靑墨渲染法)과 거친 파묵(破墨)으로 일관한 호방한 필법인데 필운대의 삽상(颯爽)하고 청랭(淸冷)한 정취가 고스란히 살아나는 느낌이다.34)
  음양 조화의 감각을 잘 드러낸 그림이다. 점 형태로 표시한 구릉의 숲과, 절대준으로 처리한 돌의 표면 및 입체감, 그리고 죽죽 그어 내린 선 형태의 송간(松幹) 표현 등에서 점, 선, 면의 추상적 표현 요소를 또한 가려낼 수 있다. 이렇듯 진경산수는 사실화법과 추상화법을 동시에 아우른다.


34) 최완수, 『겸재 정선3』, 현암사, 2009.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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