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기(약 1700~1850)의 회화 

전기 조선회화가 15세기 중엽 세종대왕의 재위연간(在位年間 1419 - 1450)을 꽃 피우고, 송(宋)/원대(元代)의 회화의 영향을 바탕으로 한국적 특성을 형성했던 반면 후기의 회화는 명(明)/청대(靑代)의 회화를 소화하면서 보다 뚜렷한 민족적 자아의식을 발현했던 미술로 가장 한국적이고 민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화풍들이 풍미했던 시대로 절파(浙派)의 화풍이 쇠퇴하고 그 대신 문인화(文人畵), 남종화(南宗畵)가 본격적으로 유행하였으며, 남종화법에 기반을 두고 우리나라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천(山川)을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한 진경산수(眞景山水)가 대두하였으며, 풍속화(風俗畵)가 풍미하였으며, 민화(民畵)가 사랑받고 널리 유행하였으며,부분적으로 서양화법(西洋畵法)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후기(약 1700년~1850년)는 특히 두드러진 새 경향의 회화를 발전시킨 시대다. 가장 한국적이고도 민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화풍들이 이 시대에 풍미하였다. 이러한 후기의 회화는 세종 때부터 꽃피웠던 조선 초기의 회화와 비교되는 훌륭한 것이다. 초기의 회화가 송, 원대 회화의 영향을 바탕으로 한국적 특성을 형성했던 데 반하여, 후기의 회화는 명, 청대 회화를 수용하면서 보다 뚜렷한 민족적 자아 의식을 발현했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의 회화가 발전하게 된 것은 새로운 회화 기법과 사상의 수용 및 시대적 배경에 연유한다. 영조와 정조 연간에 자아의식을 토대로 크게 대두되었던 실학의 발전은, 조선 후기의 문화 전반에 걸쳐 매우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한국의 산천과 한국인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아 다룬 조선 후기의 회화는 실학의 추이와 매우 유사함을 보여준다.

새로운 화법의 전개와 새로운 회화관의 탄생이 기반을 둔 이 시대 회화의 조류로는
첫째 조선 중기이래 유행했던 절파계 화풍이 쇠퇴하고, 그 대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점이다.
둘째, 남종화법을 토대로 한반도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천을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진경산수가 겸재 정선일파를 중심으로 해 크게 발달한 점이다.
셋째, 조선 후기인들의 생활상과 애정을 해학적으로 다룬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등에 의해 풍미하게 된 점이며
넷째 서양화법이 전래되어 어느 정도 수용되기 시작했던 사실등을 들 수 있다.

남종 화법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전대에 전래되어 있었던 것이나 본격적인 유행을 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이다. 이 남종화법의 유행은 조선 후기의 회화가 종래의 북종화 기법을 탈피하여, 새로운 화풍을 창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대시켜 주었다. 또한 남종화법의 전개에는 남종 문인화론이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이 형사(形似)보다는 사의(寫意)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대두되어, 역시 참신한 화풍의 태동을 가능케 하였다. 후기의 강세황, 이인상, 신위, 그리고 말기의 김정희 등은 남종화의 유행을 부채질한 대표적인 인물이라 하겠다.

절파 화풍을 계승하면서 소극적으로 남종화풍을 받아들여 그린 인물로 윤두서를 주목할 만하다. 윤두서는 산수화는 물론 인물과 풍속화도 그렸는데, 그가 남종화풍을 계승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그의 「평사낙안도(平沙落雁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근경의 낮은 언덕과 종류가 다른 몇 그루의 나무들, 넓은 수면, 그 뒤편의 산들이 이루는 간결한 구도와 구성은 그가 남종화풍의 영향을 받아 독창적인 세계를 펼쳤음을알 수 있다.

곧이어 주목할 인물은 심사정이다. 심사정은 특히 산수와 화조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심사정의 산수화풍을 보여주는 작품의 하나로 「방심주산수도(倣沈周山水圖)」를들 수 있다. 근경에는 초가집 안에 앉아서 글을 읽고 있는 선비와 괴석 및 파초를 그려 넣어 문인취향을 한껏 살리고 있다. 초가집을 둘러싼 종류가 다른 나무들, 평평한 터전과 개울물 위에 놓인 다리, 원경의 주산에서 흘러내리는 폭포, 물 건너편의 절벽등이 어울려 고즈넉한 절경을 이루고 있다.

18세기의 화가들 중에서 남종화의  발전에 누구보다도 크게 기여한 인물은 강세황이다. 강세황은 산수화, 자화상을 비롯한 인물화, 화조화, 사군자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그의 남종화풍은 「야수허정도(野水虛亭圖)」에 드러나 있다. 여름 경치를 담은 이 작품은 구도나 필묵법, 준법 등에서 남종화풍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근경의 빈정자와 몇 그루의 나무들, 중경의 넓은 수면과 그 뒤편의 마을, 후경의 안온한 주산으로 이루어진 구도, 부드러운 필묵법과 담채법등이 특징이다.

18세기 남종화에 강세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인물이 이인상이다. 그는 단양에 은거하면서 남종화를 그렸는데, 그의 전형적인 화풍은 거의 20대에 형성되었다. 그가 그린「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를 보면 잘 나타난다. 소나무 밑에 홀로 앉은 선비가 웅장히 쏟아져 내리는 폭포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부채면이 만드는 형태적 특성과 그리고자 하는 화제가 더 바랄 여지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더운 날 부채 바람에 폭포수 밑의 시원함이 실릴듯한 느낌을 준다.

이 시기 남종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면 정수영을 들 수 있다. 그의 「방황공망산수도(倣黃公望山水圖)」에서 정수영 특유의 화법이 감지된다. 왼쪽 종반부에치우친 편파적 구도, 공간 처리, 각을 이루는 꼬불꼬불한 윤곽석, 간일한 형태, 푸른기운이 도는 색조와 먹의 효과 등은 그의 화풍이 짙게 배여있다.

조선 후기에는 화원 출신들도 남종화풍을 구사하였다. 이재관은 도화서에 속하지 않은 화가로 그의 작품을 보면 남종화의 정신 세계와 기법을 제대로 소화하여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귀어도(歸漁圖)」가 좋은 예이다. 잡은 고기를 망태기에 걸어 메고 달빛을 받으며 귀가하는 어부를 다루었다. 좌우가 균형을 이룬 구도, 근경의 초가집과 나무들이 산과 냇물과 어우러진 오밀조밀한 짜임새, 달빛을 받아 명암이 대조를 이루는 분위기, 농묵과 담채의 조화, 화면 전체에 넘치는 평화로운 분위기, 어부와 강아지 사이에 오고가는 반가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남종화법을 토대로 발전된 전형적인 한국적 회화가 바로 진경산수이다. 정선에 의해 발전된 진경산수화는 한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실경을 한국적으로 발전시켜 남종화법을 구사하여 그려낸 산수화를 말한다. 본래 한국의 실경을 소재로 삼아 그리는 화습은 이미 고려 시대에 생겨 조선 초기와 중기에 걸쳐 계속 전통의 맥락을 이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정선 일파의 진경산수는 비단 한국의 실경을 소재로 다루었을뿐만 아니라, 새로이 발전된 화풍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상상에 의한 중국적 산수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보고 느낀 직접적인 시각 경험을 생생하게 화폭에 담음으로 인해서 진경산수는 농도 짙은 생동감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이라 믿어진다.

또한 시각을 당기는 구도, 개성화된 각종 준법, 농담이 강한 필묵법과 안온한 설채법(設彩法) 등은, 정선과 그의 추종자들의 화풍을 더욱 한국적인 것으로 돋보이게 한다.

정선은 수많은 진경산수화를 남겼는데, 그 중 금강산과 서울 근교의 명소를 그린 것들이 중요하다. 그의 금강산 그림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금강전도(金剛全圖)」이다. 이 그림은 금강산을 부감법으로 그린 그림으로 원형 구도를 보여준다. 왼쪽 아래편에 나무가 우거진 산들을 배치하고, 오른편 대부분의 화면에는 날카로운 바위산들이 빽빽이 서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그림의 맨 위쪽 끝에는 비로봉을 묘사하였다. 이 산들과 하늘이 마주치는 여백의 가장자리에는 연푸른 색을 칠해 허공을 나타내었고, 첨봉들의 모습이 부각되게 했다. 화면 전체에는 생기가 힘차게 넘쳐난다. 이러한 형식의 금강산 그림은 후대 화가들에게 표본이 되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齊色圖)」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에 가장 흔한 암석인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인왕산은 특히 남성적인 형세를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강한 위용을 자랑하는 희뿌연 암봉들을 시커먼 먹을 찍어 쭉쭉 그어 내리는 강한 필세로 표현하였고 산의 중간에는 뿌연 여운을 두어 신비롭게 표현하는 등 인왕산에 대한 노화가의 주관적인 해석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산의 형태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면서 동시에 비온 뒤의 촉촉한 분위기를 한껏 강조한 시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정선의 화풍은 많은 화가들에 의해 추종되었는데, 그 중 강희언을 주목할 수 있다.「인왕산도(仁王山圖)」를 보자. 인왕산의 모습을 옆에서 빗겨 보아 산줄기들이 평행사선을 이루도록 묘사한 대담한 포치와 부감법을 따른 표현과 바위의 묘사에 나타나 있는 음영법 등을 보면 강희언이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을 따르면서 서양화법을 가미했음을 알 수 있다. 계곡의 마을과 그 주변의 나무들에는 늦은 봄의 갖가지 꽃들이 만개되어 늦은 봄의 정취를 짙게 풍긴다.

김홍도도 종종 진경산수를 그렸다. 「총석정도(叢石亭圖)」는 그의 진경산수의 일면을보여준다. 기둥처럼 늘어진 총석들, 오른쪽 언덕 위에 작게 그려진 총석정, 춤추는 듯한 소나무들, 김홍도 특유의 화법이 잘 표현되어 있고 그의 독특하고 완숙한 화풍을보여준다.

이 밖에도 김윤겸, 최북, 김응환 등 조선 후기의 대부분의 화가들이 진경산수화를 그렸다. 또 주로 남종화를 취급하던 사대부 문인화가들에 의해서도 진경산수화는 높은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진경산수와 더불어 조선 후기 회화에서 가장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풍속화이다. 넓은 의미에서의 풍속화는 이미 조선 초기와 중기의 각종 계회도(契會圖)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도 있겠으나, 속화라고 불리워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풍속화는 역시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등 후기 화원들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김홍도와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김득신은 주로 서민 생활의 단면들을 소재로 삼아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양반들을 대상으로 그 양반들을 위해 그려진 전대의 계회도와는 달리, 그들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생활과 직접적 관련에서 이루어졌다. 바지 저고리와 치마 저고리를 입은 조선 후기의 서민들이 그들의 주인공이며, 초가집과 논밭과 대장간이 그 주인공들의 활동 무대이다. 이러한 풍속화는 전대의 회화에서 찾아볼 수없는 새로운 것이다. 서민들의 생활 주변에서 찾은 재미있는 소재를 간결하면서도 초점을 이루는 구도 속에 익살스럽게 승화시킨 것이 김홍도와 김득신의 풍속화가 지니는 큰 특성이라 하겠다.
김홍도나 김득신과는 대조적으로 신윤복은 남녀간의 애정 문제를 파헤치는데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의 주인공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서민들이기보다는 인생의 즐거움을 음미하는 한량이나 기녀, 양반들이 대부분이다. 아직도 유교적인 규범이 엄했던 당시에 남녀간의 애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던 것은 당시의 사회적 풍조를 고려해도 대담한 용기를 필요로 했을 것이라 믿어진다. 신윤복은 산수나 옥우를 배경으로 그의 주인공들을 섬세하고 유연한 필치와 산뜻한 채색을 구사하여 세련되게 표현하였다. 이렇듯 신윤복은 소재의 선택, 구도, 배경의 설정, 필법, 설채법 등등 다각적인 면에서 김홍도와 김득신과 큰 차이점을 보여 준다.

김홍도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산수, 인물, 영모, 화조 등 모든 분야에 뛰어났던 18세기의 대표적 화원이다. 그의 공적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국적인 화풍을 풍속화 부분에서 창출하여 조선시대 우리 문화와 역사의 이해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그는 풍속화가 지녀야 할 시대성, 기록성, 사실성을 살려 창의성과 해학성으로 풍속화를 예술적 세계로 승화시켰다. 김홍도는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재미있는 소재를 포착하여 해학이 넘치는 미의 세계로 구체화하였다. 대부분 서민들의 일상생활이나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을 소재로 한다.
그의 단원풍속화첩에 실린 「씨름」은 그가 18세기 풍속화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말해준다. 씨름하는 인물들과 주변의 구경꾼들을 효과적인 원형 구도로 포착한 이 작품은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한 풍속화의 대명사로 불리는 김홍도의 세련된 기량을 보여준다. 씨름하는 순간의 흥분된 분위기를 전달하는 여러 인물들의 생동감 넘치는 자세와익살맞은 표정들, 투박한 듯하면서도 간결한 격조를 잃지 않은 개성적인 선묘, 여유로운 공간의 운용 등 뛰어난 점을 찾아 볼 수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들은 우리네 일상사의 주변 삶의 현장을 재치있게 재현하면서 우리 민족의 건전한 정서와 미감을 잘전달해 주고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그의 제자인 김득신에게 충실하게 계승되었다. 김득신도 김홍도처럼 병풍에 산수 배경을 중시하여 그린 것과 산수배경 없이 풍속 장면만을 그린 두가지 계통의 풍속화를 제작하였다.

김득신의 「파적」은 그의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한적한 봄날, 농가의 안마당에서 생긴 사건을 포착하여 그렸다. 병아리 한 마리를 낚아 채고 도망가는 고양이와 이를 쫓는 어미닭, 이에 놀라  황급히 버선 바람으로 마당으로 뛰어내리며 고양이를 향해 소리지르는 주인과 그 부인. 순간적으로 벌어진 상황을 생생하게 표현했으며, 주인 영감의 시선과 고양이의 잽싼 눈빛, 주인 마나님의 화들짝 놀라는 움직임 등이 작품 전체에 긴장감을 돋우어 준다.

김홍도나 김득신과는 또 다른 측면의 풍속화를 개척한 인물이 신윤복이다. 신윤복은 김홍도의 화풍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기 자신의 독특한 풍속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우리나라 회화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윤복 풍속화의 높은 수준과 전형적인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은「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이다. 모두가 잠든 고즈넉한 달밤에 밀회를 즐기는 한 쌍의 남녀를 표현한 이 작품은 신윤복 특유의 은근하고도 감각적인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깊은 밤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알리"라고 한 화제가 그림의 분위기를 한층 돋우는데, 살며시 고개 숙인 수줍은 여인과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는 훤칠한 미남의 모습이 낭만적인 정서를 전달해 준다.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표현과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색조의 사용 등 신윤복은 새로운 미감의 풍속화의 경지를 개척해내었다.

조선 후기에는 인물화에서도 새로운 양상과 진전이 이루어졌다. 이 시대 인물화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초상화이다.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린 표현은 물론 그인물이 가지고 있는 성격, 교양, 학문 등을 얼굴에 배어나도록 그리는 경지를 빼어나게 구현하였다.

이 시대 초상화 중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윤두서가 그린 「자화상」이다. 윤두서는 인물이나 동물을 그릴 때에는 며칠 동안 관찰하여 그 진형을 파악한 다음에야 비로소 붓을 들었고 이 때문에 그의 말그림과 인물화는 생동적이다. 이 점은 그의 자화상에서도 확인된다. 이 작품은 한국의 몇 안되는 자화상 중의 하나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전신상이거나 상반신 상으로 그려지는 초상화의 전통적인 관례를 무시하고 화면을 직시하는 강렬한 시선의 얼굴 부분을 강조한 이 작품은 뛰어난 사실감과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느끼게 하는데, 거울을 보고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수염을 그리는데 사용된 생동감 넘치는 섬세한 선묘와 면으로 처리된 두건 부분의 대범한 묵법, 안구와 눈동자 및 눈 주변에 사용된 배채기법은 화가의 폭넓은 기량을 보여준다.

18세기 인물화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신윤복의 「미인도」를 들 수 있다. 살포시 비껴 틀어 서 있는 요염한 자태의 이 여인은 한국의 전형적인 미인상을 보여준다. 초승달 같은 눈썹에 은행같은 두 눈, 앵두 같이 빨갛고 작은 입술, 둥그레한 가녀린 얼굴 선, 몸에 착 달라붙은 저고리로 드러난 홀쭉한 몸매, 배추 포기처럼 부풀은 치마, 오이씨 같이 고운 발맵시 등 고혹적이면서도 결코 천박하지 않은 자태를 뛰어나게 표현한 신윤복은 여인상에 관한 한 거의 독보적인 화가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간결한 필선, 정확하고 사실적인 조형, 품위 있는 색채의 절제된 구사 또한 작품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물화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뚜렷하게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변상벽이다. 그는 고양이 그림 전문가가 되어 '변고양'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의 유명한 「묘작도(猫雀圖)」는 그의 고양이 그림의 진면목을 잘 보여준다. 왼편 아래에서 솟아오른 뒤틀린 고목 위를 한 마리의 고양이가 기어오르다 나무 밑에 앉아 올려다 보는 고양이를 대화라도 하듯이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두 마리의 고양이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감이 인상깊게 나타난다. 고목의 윗부분은 와면에서 잘린 듯 표현되었는데 가지들에는 약간의 잎들이 파리하게 나 있고 여섯 마리의 참새들이 짹짹거리고 있다. 나무를 기어오르는 고양이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나무와 굵은 가지는 여기저기에 연륜을 말해 주는 큼직한 옹이들이 나 있으며 뒤틀리듯 비틀어져 있다. 변상벽의 고양이 그림은 조선 초기 이암의 강아지 그림과 함께 우리 나라 동물화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이 밖에 정조대왕의 파초, 매화, 국화 그림, 심사정의 화조와 초충, 유덕장과 신위의 대나무, 임희지의 난초 등도 유명하다.
또 조선 후기의 회화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중국을 통한 서양 화법의 전래와 수용이다. 명암법과 원근법 및 투시도법이 특징인 서양법은 청조에서 활약한 서양 신부들에 의해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우리 나라는 연경을 오고가는 사행원들의 손을 거쳐 전래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김두량, 이희영, 박제가 등의 일부 18세기 화가들이 수용하기 시작한 서양화법은 그 후에도 화원들에 의해 궁궐의 의궤도(儀軌圖)나 민화의 책꽂이 그림 등에도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 화가들이 수용한 서양화법은 오늘날의 유화와는 달리 한국적 소재를 명암이나 요철법 또는 투시도법을 가미하여 다룬 수묵화의 한 가지이다. 이 화법은 널리 유행하지는 않았지만 회화사의 근대화를 예시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이 화법의 전래와 수용은 19세기의 한국 회화가 이색적인 화풍을 형성할 수 있게 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 믿어진다.

지금까지 분야별로 간략하게 소개했듯이 조선 후기에는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한국적인 회화가 각 분야에서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에 무르익어 19세기 전반기까지 계속되었으나 조선 말기로 편년되는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큰 성격의 변화를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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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약 1550~1700)의 회화 

조선 중기(약 1550년~1700년)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대란이 잇달아 생기고 사색붕당이 계속되어 정치적으로도 매우 불안한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색있는 한국적 화풍이 뚜렷하게 형성되었다.

이 시대에는
첫째, 조선 초기 강희안 등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한 절파계 화풍이 김시, 이경윤, 김명국 등에 의해 크게 유행하였고
둘째 이정근, 이홍효, 이징 등에 의해 조선 초기의 안견파 학풍이 추종되고 있었으며
셋째 이암, 김식, 조속 등에 의해 영모나 화조화 부분에 애틋한 서정적 세계의 한국화가 발전하게 되었고
넷째 묵죽, 묵매, 묵포도 등에서도 이정, 어몽룡, 황집중 등의 대가들이 꽃을 피웠다.
이 밖에도 중국 남종 문인화가 전래되어 소극적으로나마 수용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조선 중기에 이처럼 회화가 발전될 수 있었던 까닭은 조선 초기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사실 중기의 화가들은 안견파 화풍을 비롯한 조선 초기의 회화 전통에 집착하는 경향이 두드러졌고,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의 토대 위에 수용하였다. 또한 이 시대의 화가들은 한가지 화풍에만 집착하기보다는 두서너 가지의 화풍을 수용하여 그리는 경향을 현저하게 나타냈다. 이 밖에도 이 시대에는 사대부와 화원들 중에 화가 집안을 형성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기도 했다.

중기의 회화에서 또한 크게 주목되는 것은 조선 시대적인 정취를 짙게 풍겨주는 영모나 화조화가 발달했던 사실이다. 안경을 쓴 듯 귀여운 눈을 지닌 이암의 「화조묘구도(花鳥猫狗圖)」, 달무리진 눈매와 퉁퉁한 몸매를 보여주는 퇴촌 김식의 「우도(牛圖)」, 애잔한 느낌을 자아내는 창강 조속과 매창 조지운 부자의 수묵화 조화 등은 그대표적인 예들이다. 탄은 이정의 묵죽도, 설곡 어몽룡의 월매도, 영곡 황집중의 묵포도도 등에서도 한국화 현상이 현저히 엿보이고 있다.

김식은 그의 증조부인 김제에 이어 가법에 따라 물소 그림을 즐겨 그렸다.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우도(牛圖)」는 간일하고 애잔한 산수를 배경으로 어미소와 젖을 빠는 송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언덕과 나무의 표현에는 이 시대에 풍미한 절파 화풍이 두드러져 보인다. 음영법으로 표현된 몸, 검은 눈, ×자형의 콧등, 곡선진 뿔, 점선으로 정의된 등 등이 돋보이는 소의 모습은 확실히 김식을 중심으로 한 이 시대 서정적인 동물화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이 시대 화조화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은 조속의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이다. 화면을 메우듯이 펼쳐진 나뭇가지들과 나뭇잎들, 쌍쌍이 마주앉은 까치들, 삼각형의 잎새들, 채색을 배제하고 수묵으로만 이루어진 묘사법 등이 돋보이며 이 시대 화조화의 경향을 대변해 준다. 조속의 화조화는 그의 아들인 조지운과 그 밖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시대 사군자 중에서 대나무와 매화가 특히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대나무 화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은 이정이다.

이정은 어려서부터 천재화가로 수문이 났으며, 묵필의 힘이 수준 높게 느껴지고 있는 이들 그림에서 우리는 간략한 먹선으로 단번에 공간을 구성하는 뛰어난 안목과 그림의 내부에 감추어진 강렬하면서도 원숙한 조형의 힘을 감지할 수 있다.

왕실출신인 그는 임진왜란 때에 왜병의 칼에 오른팔을 상하여 그 후에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데, 「묵죽도(墨竹圖)」에서 보듯이 절파풍의 바위 주변에 자생하는 대나무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균형잡힌 포치, 농묵으로 묘사된 근경의 대나무와 그 뒷편의 담묵으로 흐리게 표현된 대나무의 대조, 강경한 줄기와 길고 날카로운 잎의 조화, 힘에 넘치는 필력 등이 돋보인 대가로서의 이정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대나무 못지 않게 매화가 자주 그려졌는데 주로 백매화를 수묵으로만 그리는 풍조가 유행하였다. 특히 어몽룡이 유명했는데,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월매도(月梅圖)」에서 보듯이 늙은 가지는 꺾어진 모습으로, 새 가지는 하늘을 향하여 치솟는 모양으로 묘사되어 대조를 보인다. 이 밖에 줄기에 가해진 농묵의 점법도 매화가지의 형태를 마무리 지어주고 생기를 불러 일으킨다. 매화꽃의 형태는 구체적이기 보다는 대강의 모습만을 담묵으로 대범하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매화그림은 이 시대에 폭넓게 유행하였고 후기에도 계승되었으나 후기에는 주로 홍매를 붉은색을 써서 그리는 경향으로 바뀌어 갔다.

조선 중기의 회화에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먹으로 그리는 포도그림의 유행이다. 포도의 화가로서 유명한 사람은 황집중이다.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묵포도도(墨葡萄圖)」는 이 시대 포도그림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비록 본래의 훨씬 컸던 작품의 잔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위로부터 아래편으로 빗겨져 뻗어 내린 가지의 대각선 포치, 음영이 적절히 구사된 둥근 포도알의 입체감, 벌레먹은 넙적한 잎, 꼬불꼬불한 덩굴의 말림새, 윤곽선 없는 줄기, 거침없는 필법과 농담의 변화가 두드러진 묵법 등이 주목할 만하다. 황집중의 이와 같은 화풍은 포도그림의 모체가 되었다.

조선 중기의 화가들 중에서 제일 먼저 주목되는 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김제이다. 그는 산수, 인물, 우마 등 다방면의 주제를 그렸고 화풍도 다양했으나 특히 안견파 화풍과 절파계 화풍을 즐겨 그렸다.

 

안견파 계통의 작품으로는 「한림제설도(寒林霽雪圖)」가 대표적이다. 이 그림은 그가 만 60세 되던 때인 1584년 가을에 안사확이라는 사람을 위해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의 구도나 공간 처리 등은 안견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사시팔경도」 중의 「초동」에 토대를 두고 횡으로 좀 더 확산시킨 듯한 느낌을 준다. 왼쪽 종반부에 치우친 편파구도, 수면을 따라 펼쳐지는 확 트인 공간 등은 두 작품 사이의 상호 관계를 말해준다. 그러나 김제의 작품에서는 근경과 원경 사이에 산 허리나 다리를 배치하여 일종의 삼단구도를 형성하고 있고, 또 산의 기울어진 형태가 절파계의 영향을 반영하고있는 것이 차이다.

김제 화풍의 또 다른 현상은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에 잘 드러나 있다. 나귀의 고삐를 잡아 당겨서 다리를 건너게 하려는 귀여운 동자와 건너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나귀 사이의 안간힘을 표현한 이 작품은 절파계 화풍을 수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인물 중심의 주제, 기울어진 주산의 형태, 흑백의 대조가 현저한 산의 묘사, 굴곡이 심한 소나무의 형태, 강한 필묵법 등은 절파 화풍의 영향을 입증한다. 김제는 이처럼 안견파 화풍과 함께 절파계 화풍도 그렸음이 분명하다.

함윤덕의 「기려도(騎驢圖)」는 소경산수인물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절벽과 나뭇가지가 이루는 삼각형 공간에 주제인 나귀를 탄 시인의 모습을 담아 그렸다. 시인과 나귀가 어울려 삼각형을 형성하고 있어 절벽과 나뭇가지가 이루는 보다 큰 삼각형과 조화된다. 나귀를 탄 시인이 중심이 되고 주변의 경치는 무대장치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그치고 있어 소경산수인물화의 전형을 보여줌과 동시에 15세기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와 잘 비교된다. 이 점은 조선 중기의 회화가 초기의 회화의 전통을 계승했음과 더불어 초기에 들어와 있던 절파계 산수인물화가 중기에 크게 유행되었음을 말해 준다. 시인의 옆 얼굴에 드러나 보이는 선비다운 분위기, 당나귀의 비척거리는 동작, 의습에 가해진 변화있는 의습선과 옅은 담홍색 등은 약해 보이는 절벽의 묘사에도 불구하고 함윤덕의 범상하지 않은 화가였음을 보여준다.

김제, 함윤덕과 더불어 주목되는 화가는 화원 이정근이다. 이정근은 안견파 화풍과 미법산수화풍을 함께 그렸다. 그의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는 안견파 화풍을 계승하여 자기화하였다. ×자 형의 구성, 식빵 덩어리를 연상시키는 특이한 산의 형태, 뒤로 물러가면서 깊어지는 거리감과 오행감, 크고 작은 변화가 심한 필채, 녹두색 위주의 설채법 등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특징들의 상당부분은 그 전의 안견파 화풍과는 다른 차이를 보여준다. 이는 16세기 후반, 조선 중기에 이르러 안견파 화풍이 많은 변화를 겪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또 다른 측면은 그의 「미법산수도(米法山水圖)」에 잘 드러나 있다. 길게 이어지는 대각선 구도, 가까운 곳은 진하게, 멀리 있는 곳은 연하게 그린 필법, 미법, 남종화에 자주 보이는 필법 등은 앞의 작품과는 다른 요소들이다. 이 작품을 통하여 남종화풍이 조선 중기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선 중기의 화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화풍을 창출했던 인물은 아무래도 김명국이다. 그는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 통신사의 화원으로 일본에 가서 크게 환영받았으며 그곳에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 중에서 특히 널리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와 「달마도(達磨圖)」이다. 김명국 또한 김시, 이경윤 등과 함께 절파화풍(浙波畵風)을 구사하였으며, 그가 사용한 절파화풍은 거칠고 과장된 기운이 감도는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에 가까운 것으로 이 그림은 그러한 경향의 화풍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강하고 거칠면서도 속도감 있는 선의 움직임과 나무나 산, 바위를 표현하는데 나타나고 있는 날카롭게 각이 져서 꺽여들어간 형태 표현 등이 이 그림을 개성이 강한 작품으로 만들고 있다. 그는 또한 일본에서도 유명하였으며, 그의 인물화는 강하면서도 속도감이 있는 거친 먹선으로 인물의 특징을 간략하고 단순하게 그려 낸 것으로 그의 이러한 방법으로 그려진 대표적인 그림은 달마도(達磨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일본인들이 즐겨 그리는 달마도의 화풍은 김명국에게서 전하여 졌다고 한다.

「설중귀려도」에서는 화면을 압도하는 대각선 구도, 영산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느낌의 주산, 거칠고 힘에 넘치는 수기법과 필묵법 등이 어울려 힘을 발하고 있다. 김명국은 그것을 극대화시켰다. 그의 호방한 성격이 유감없이 이 작품에 발휘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측면은 그의 「달마도」에서도 구현되어 있다. 빠르고 힘차게 순식간에 그려낸 의습과 이목구비, 얼굴에 넘치는 정신세계, 간결하면서도 변화감이 큰 필묵법등이 어우러져 대표적인 달마화상을 창출하였다.

조선 중기의 회화와 관련하여 산수화 못지 않게 주목되는 되는 것은 높은 수준의 인물화의 발달이다.
이 시대의 인물화는 「어초문답도(魚樵問答圖)」같은  작품에 의해 대변된다.

인물화를 잘 그렸으며, 힘차면서도 분명한 필력을 지닌 화가이다. 그의 인물 표현은 골격과 근육에 힘이 있고, 옷주름 선이 유달리 강하고 복잡하며 날카롭고, 얼굴 표정이 정세(精細)한 특징이 있다.

 왼손에 물고기 꾸러미를 들고 오른쪽 어깨에 낚싯대를 멘 어부와 허리에 도끼를 꿰어찬 초부가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귀가하는 모습을 갈대숲을 배경으로  하여 묘사한 「어초문답도」는 결국 은둔자로서 선비들의 초탈한 생활의 일면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주제가 조선  중기에 종종 그려졌다.  특정한 선비들의 초상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기운 생동하는 정확한 얼굴 묘사,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정담, 자연스러운 걸음걸이와 동작, 힘을 넣고 빼면서 가해진 의습선 들이 한결같이 돋보인다.

이와 같이 조선 중기의 회화도 조선 초기 회화의 전통을 잇고 새로운 화풍을 가미하면서 조선 중기 특유의 양식도 발달시켰다. 이 시대는 수묵화의 전성기라고 지칭해도 좋을만큼 묵법에서 대단한 발전을 이루었다. 다양한 주제의 구사, 상이한 화풍의 수용, 변화있는 필묵법 등은 이 시대의 회화에서 쉽게 엿볼 수 있는 현상들로 주목된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과 보수적 경향 때문이었는데 이미 들어와 있던 남종화풍은 아직 적극적으로 유행되지 못했다.

▶조속(趙涑)의 조작도(朝鵲圖) 조속은 화조화(花鳥畵) 특히 까지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의 그림에서 나무와 새들의 배치상태는 매우 세련된 구성미를 보이고 있으며, 나뭇가지를 형성하고 있는 먹선의 흐름이 속도감과 농담에 자연스런 변화가 있으면서 거침이 없는 노련미가 보인다. 특히 새들의 움직임이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표현되어 새 그림의 대가라는 평가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포도(葡萄) 그림을 잘 그린 집중(黃執中 1533 - 1593)의 묵포도도(墨葡萄, 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계호(李繼祜 1574 - ? )의 포도도(葡萄圖, 간송미술관 소장)와 매화(梅花) 그림으로 유명한 어몽룡(魚夢龍 1566 - ? )의 월매도(月梅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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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918~1910) 시대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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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건국은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이 고려 태조왕건(太祖王建)에게 왕권을 이양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어 고려의 미술 등 문화 예술도 그대로 신라의 것을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회화는 크게 일반회화(一般繪畵)와 불교회화(佛敎繪畵)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일반회화는 전하는 작품이 적은 아쉬움이 있다. 고려의 회화는 격렬한 원색을 쓰지 않은 은은하고 깊은 맛이 있으며, 여성적이며 귀족적인 특징을 지니는바 이는 개국(開國) 초기부터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수립을 위하여 무적(武的)인 성격이 강한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유교적(儒敎的) 문치주의(文治主義) 채택하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일반회화 분야에서는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가 그려지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이녕(李寧)의 그림은 송(宋)나라의 휘종도 높이 평가하였다고 하며 예성강도(禮成江圖)와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가 유명하다 알려져 있으나 전해지는 그의 작품은 없으며, 그의 아들 이광필(李光弼)도 그 당시 명종(1170 - 1197)의 총애를 받은 화가라 알려져 있으나 그의 그림 역시 전해지는 것이 없는 실정이다. 고려시대에는 인물화뿐만이 아니라 산수화(山水畵), 화조화(花鳥畵), 영모화(翎毛畵), 사군자(四君者) 등의 다양한 회화 분야가 전개되고 그 수준도 상당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북송(北宋)의 이곽파(李郭波) 화풍과 남송(南宋)의 원체화풍(院體畵風), 원(元)의 미법산수화풍(米法山水畵風)을 받아들여 새롭게 고려 나름의 개성적인 화풍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제현(李齊賢)의 기마도강화(騎馬渡江畵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남송(南宋)과 원(元) 풍의 회화 영향을 고려 풍의 시원한 공간구성과 개성적인 형태 표현의 방법으로 새롭게 창조하였다고 하며, 작가 미상의 하경산수도/동경산수도(夏景山水圖/冬景山水圖 : 일본 교토 金地院 所藏)는 원(元)의 고극공(高克恭)류의 미법산수화풍을 이용하여 그린 것으로 보인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은 예술가로서 명망이 높아 글씨 및 인물, 산수, 영모화를 잘하였다고 하며 그가 그린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양도(羊圖 : 澗松美術館 소장)가 전하여 진다. 천산대렵도는 노루가 뛰고 말이 달리며 사냥하는 장면을 설채(設彩)로 묘사한 것으로 생동감이 있는 화격(畵格)이 높은 걸작이라 하겠다.

고려시대의 불교회화는 일반회화가 별로 전하여지는 것이 없는 반면 약 120여점의 작품이 국내외(대부분 일본)에 전하여지고 있으며, 불교회화는 당시의 최고 작가군(作家群)들인 화원(畵員)들이 주로 그렸거나 그에 버금가는 화사(畵師)들에 의해 그려져 불교회화사(佛敎繪畵史)를 고려회화사(高麗繪畵史)라 해도 무방하다 하겠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회화는 전에 없이 다양성을 띠며 발전하였다. 실용적 기능을 지닌 작품들뿐만 아니라 여기(餘技)와 감상(鑑賞)의 대상이 되는 순수 회화도 활발히 제작되었다. 회사를 관장하는 도화원이 설치되었으며, 상당수의 화가와 작품이 문집과 사서에서 확인되는 등 회화가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회화가 실용적인 기능에 치우쳤기 때문에 회화가 자연화공들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었으나, 고려시대에는 비단 화원들 뿐만 아니라 왕공 귀족들과 승려들도 감상화의 제작과 완성에 참여함으로써 화가의 계층이 넓어지게 되었고 또한 회화의 영역도 인물화 위주의 차원을 넘어 감상을 위한 산수화, 영모 및 화조화, 묵죽, 묵매, 묵란 등의 문인취향의 소재로까지 확대되고 다양화되는 경향을 띠었다.
왕의 진영, 공신의 초상을 그린 인물화와 탱화, 변상도 등의 불교 회화, 국학, 문묘 벽화 등의 유교 회화 및 산수, 영모, 궁정 누각도, 계회도 등의 일반 회화에까지 매우 다양했으리라고 짐작된다. 이제 회화는 고대의 고식성을 벗어나 보다 차원 높은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고려의 회화는 12세기에 이르러 특히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고, 나라를 영예롭게 하는 것으로까지 여겨졌음이 이영에 대한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초상화에서는 제왕·공신, 기타 사대부들의 초상이 빈번하게 제작되었는데, 특히 제왕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진전(眞殿)의 발달은 더욱 괄목할 만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 시대의 초상화는 「안향상」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필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318년의 작품임이 확인되었다. 평정건을 쓰고 홍포를 입은 반신상으로 우리 나라에 주자학을 처음으로 전래한 학자의 풍모가 잘 드러나 있다. 뚜렷한 눈매, 가느다란 눈썹, 아담한 코, 단아한 입, 잘 다듬어진 수염 등이 학자다운 모습을 진솔하게 나타내고 있다. 특히 얼굴에 연한 붉은 색을 칠해 피부색을 표현한 점도 주목된다.

회화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산수화도 전에 없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우리 나라에 실제로 존재하는 경치를 대상 삼아 그리는 실경 산수화가 태동되었던 것은 특히 주목을 끈다. 송나라 휘종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던 이령(李寧)의 「예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를 위시하여 필자 미상의 「금강산도」, 「진양산수도」「송도팔경도」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이미 고려 전기에 한국적인 실경산수화가 발전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세한삼우도」, 전 고연휘의「하경산수도」,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이제현의 「기마도강도」, 노영의 「흑칠금니소병」에 그린 「지장보살도」 등이 있다.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수렵도」는 말을 탄 인물과 마른 나무, 풀 등 극도의 사실적인 필치는 웅대하고 품위있는 현세감을 느끼게 한다.

이 중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은 노영이 그린 「지장보살도」의 배경 산수이다. 근경에는 반가의 자세를 취하고 오른손에 보주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과 이 보살을 향해 경배하는 승려와 공양하는 노영의 모습이 좌우에 묘사되어 있다. 원경에는 두건을 쓰고 여의를 든 채 광채를 발하며 서 있는 담무갈보살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를 향하여 엎드려 경배하는 고려 태조의 모습이 지장보살의 머리 뒷편에 있는 산 위에보인다. 이 장면은 태조 왕건이 금강산에 갔다가 담무갈보살을 만나게 된 것을 표현한 것이며, 따라서 이 그림에 보이는 뾰 족뾰족한 산들은 바로 금강산을 나타낸 것이다. 이 그림의 산수 배경은 금강산 실경을 압축해서 나타낸 일종의 실경산수화인 동시에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금강산도이다. 날카로운 능선과 뾰족한 첨봉들이 뒤로 물러나면서 높아지고 있으며 그 주변을 구름이 맴돌고 있다. 이러한 바위산들의 표현은 조선 후기의 금강산도에서도 자주 엿보이고 있어 금강산도의 전통이 고려 후기부터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4세기 고려 산수인물화의 양상을 파악하는데 「지장보살도」와 더불어 도움이 되는작품으로 이제현의 「기마강상도」가 있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 사냥을 떠나는 기마인물들을 산수를 배경으로 하여 묘사한 이 작품에는 전반적으로 가늘고 여린 필선과애매한 언덕 묘사 등에서 여기화가의 솜씨가 두드러져 보인다. 오른편 상단부에 매어달린 듯한 모습의 산, 그 허리를 휘감고  있는 굴절된 소나무의 형태 등의 묘사가 뛰어나다. 넓은 강을 통해 펼쳐지는 확 트인 공간의 구성과 짜임새  있는 구도, 잎이 떨어진 앙상한 눈이 덮인 나무의 형태 등에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한국적 특성이 두드러져 보여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왼편 중앙에 서 있는 눈이 덮인 나무는 고려 후기 및 조선 초기 회화에서 종종 엿볼 수 있어 주목된다.

말을 타고 수렵하는 장면을 산수를 배경으로 하여 표현한 대표적 그림으로는 공민왕의 「수렵도」가 있다. 본래 기다란 두루마리 그림에서 잘려진 잔편으로 보이는 이그림은 말을 몰아 사냥감을 향해 달리는 기마인물을 주제로 다루었는데 배경의 산과초목의 표현에는 북종화의 전통이 엿보인다. 규칙적인 산등성이의 표현, 줄지어 서 있는 풀포기의 묘사, 근경의 잡목들의 형태 등이 북종화의 잔영을 드러내 보여준다. 근경의 낮은 언덕이나 원경의 나지막한 산들과는 달리 중경은 평평한 땅으로 남겨 놓아 공간의 여유를 느끼도록 배려한 점이 역시 확 트인 공간을 중시하는 우리 민족의 공간 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공간이 넓은 대각선 띠를 이루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그러나 이러한 산수 배경보다는 기마 인물에 더 큰 비중이 주어져 있다. 달리는 말과 인물의 힘찬 동작과 그들에게서 우러나오는 기운 넘치는 느낌 등은 그 정확한 묘사와 함께 이 작품의 화가가 산수보다는 오히려 인물과 동물의 표현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대부분 일본에 건너가 있는 고려 불화는 관경변도, 나한상, 관음보살상, 지장보살상, 아미타여래상 등을 포함하여 거의 70여 점에 달하는데 정성을 들인 정밀한 표현 속에 깊은 종교적 분위기와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 회화 역시우수한 작품은 국내에는 호암미술관 소장품 이외에는 거의 없고 일본에 80여 점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 작품들 중에서도 1286년 제작된「아미타여래입상」, 동경 천초사 소장의 「양류관음상」, 서구방이 1323년에 그린 「수월관음보살도」등은 고려시대 불교회화의 높은 수준과 독특한 성격을 특히 잘 보여준다. 이러한 그림들은 한결같이 금빛과 채색이 찬란하고 의습과 문양이 정교하며 자태가 단아하여 고려적인 특색을 짙게 풍긴다.

일본 동경의 천초사에 소장되어 있는 혜허(慧虛)의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는 현존하는 고려 시대의 불교 회화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의 하나다. 비단 바탕에 아름다운 색을 써서 그린 이 작품은 관음상의 유연하고 곡선진 몸매, 부드러운 동작, 투명한 옷자락, 호화로운 장식, 가늘고 긴 눈매, 작은 입, 섬섬옥수와 가냘픈 버들가지등이 고려적인 특색을 너무나도 잘 드러내 준다. 관음의 이목구비는 물론, 옷자락과 문양 하나하나까지 완벽하리만큼 정교할 뿐만 아니라, 소홀히 다루어진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고려 불화의 특징은 서구방의 「양류관음반가상(楊柳觀音半跏像)」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왼편을 향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유연한 자세, 가늘고 긴 부드러운 팔과 손가볍게 걸쳐진 투명하고 아름다운 사라(紗羅), 화려한 군의, 보석 같은 바위와 그 틈새를 흐르는 옥류, 근경의 바닥에서 여기저기 솟아오른 산호초,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울려 극도의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가늘고 긴 눈, 작은 입, 배경의 긴 대나무, 투명한 유리사발 안에 안치된 쟁반과 그것에 꽂혀있는 대나무 가지, 얼굴과 가슴 그리고 팔과 발에 그려진 황금빛 등도 이 시대의 불교회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특징이며, 화려하면서도 가라앉은 품위 있는 색채, 섬세하고 정교한 의복, 균형잡힌 구성 등도 간과할 수 없는 특징이다.

▶혜허의 관음보살입상(觀音菩薩立像) 세로로 긴 화면에 시원하고 우아한 형태의 물방울 모양 안에 관세음보살이 서있는 그림이다. 화면의 상반부가 대부분 비어 있고 하반부에는 왼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오른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 관세음보살이 서있으며 그 외에 비어있는 공간은 명상의 자리이며, 사색을 유도하는 신비의 공간이며, 영혼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긴장된 환희의 공간이라 하겠다.  관세음보살의 아래에는 물이 흐르고 있으며, 그 위를 꽃들과 색색의 보석이 조용히 빛을 발하며 솟아올라 있는 시원하고 우아한 신비감이 있는 그림이다.

▶자회의 아미타여래도(阿彌陀如來圖) 아미타여래, 아미타불이라고 하는 부처님은 한 없는 수명을 가진 분이라 하여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하며, 한없는 광명을 가진 이라 하여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한다. 자회가 그린 아미타여래도는 얼굴과 가슴 등 신체가 정면상을 취하고 있는 일반적인 아미타여래도와는 달리 신체의 움직임에 다양한 변화가 있다. 발걸음은 왼쪽으로, 가슴은 정면을, 얼굴의 시선은 오른쪽을 그리고 왼팔은 구부려 어깨 높이까지 들어올리고 있으며 오른팔은 아래로 내뻗고 있는 신체의 움직임을 변화있게 그려 거침이 없고 명쾌한 생명의 힘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미륵불(彌勒佛)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 어지럽고 혼탁한 현세에서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보살이다. 선도사(善導寺)에서 소장하고 있는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는 위엄과 기품이 있는 그림으로 선이 매우 섬세하고 유려하면서 대상의 움직임을 정확하고 깔끔하게 그린 세련미가 있는 그림이다.

이 밖에 고분벽화로는 경기도 개풍군 수락암동의 십이지신상과 경남 거창군 둔마리고분의 「주악천녀도」 등이 있어 당시의 풍습과 의식등을 짐작할 수 있으나, 기법상당시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조선시대 화조화 이야기

조선시대에 미술 중에서도 회화는 우리 나라 미술사상 가장 크게 발전을 한 시기이다. 건국 초부터 도화원(圖畵圓)이 설치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회화미술이 꽃피게 되었다. 상당수의 사대부 화가들이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불교를 삼았던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와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여 그 전까지의 문화와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냈다. 즉, 이 시대를 시종일관 지배했던 억불숭유정책은 당시의 문화를 검소하고 실용적이며 소박한 성격의 것으로 발전하게 했다. 조선시대의 회화는 고려시대보다도 더욱 다양해졌고, 한국화현상을 더욱 뚜렷하게 이룩하였다. 이러한 한국화 현상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구도, 공간처리, 필묵법, 준법, 수기법등에 현저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회화는 5세기 이상의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변화를 거듭하였던 것이니, 양식(樣式)의 변천에 따라 초기(1392~약1550년), 중기(약1550년~약1700년), 후기(약1700~약1850년), 말기(약1850년~1910년)의 4기로 나눌 수 있다

1.조선 전기( 제 1기 )
조선 초기는 조선 왕조가 건립된 14세기말부터 15세기말까지 약 백년간으로, 고려 때에 비하여 그림의 환경이 달랐다. 유교가 국교가 됨에 따라 유교 교양을 지닌 사대부·문인의 취미가 감상화를 지배하였고, 나라에 도화서(圖畵署)가 설치되어 화원들의 활동이 명백하게 되었다. 곧 조선왕조에 들어서면 예배·기원의 불화가 아닌 감상화가 그림의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는 우리 역사상 회화가 다양한 양상을 띠며 대단한 발전을 이룩했던 시기 이다. 고려시대와는 달리 억불 숭유 정책으로 고려시대에 많은 활약을 했던 승려들의 활동은 약화되었지만, 학문을 중시하고 소박하고 진실됨을 추구하던 유교 정신을 새로운 미의식을 창출해내었다. 2)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청록산수화와는 달리 담백한 수묵(水墨) 위주의 산수화가 주를 이루고, 화조화나 영모화에 있어서도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 배어나오는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선비들의 경우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천기(賤技)로 생각하여 경시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조선시대의 그림을 기교에 빠지지 않고 더욱 담백하고 기품 있는 그림으로 승화시켰을 것이다.
또한 조직화된 도화서를 중심으로 기량이 뛰어난 화가들이 배출되어 한국화의 폭을 넓혔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부터 유입되기 시작하던 중국의 회화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회화 전통은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수묵화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조선 전기(1392-1550)는 조선왕조가 개국하여 국가적으로 나라의 기강을 확고히 하고, 회화에 있어서도 조선시대 특유의 한국적 화풍이 자리를 잡는 시기인 중종 연간까지를 잡는다. 이때는 새로 정비된 제도 하에서 도화서를 중심으로 한 화원 화가들과 선비 화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 시대에는 이미 고려시대에 들어온 중국 그림과, 새롭게 유입된 명대의 화풍이 토대가 되어 한국적 화풍을 형성해 갔다.

조선 초기 최대의 거장 안견은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른 전칭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다. 그런데 이들 그림을 통해서 보면, 안평대군의 수장품 목록에도 있는 곽희(郭熙)의 화풍을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곽희파 화풍은, 조선 초기의 산수화단에 제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안견(安堅)화풍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안견의 화풍에는 비단 곽희파 화풍뿐만 아니라 남송 원체파 화풍과 원말 명조(元末明初)의 매너리즘의 여향도 가미된 것은 사실이자만 그 주된 기반은 역시 곽희파 화풍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그러나 이를 바탕으로 구도와 필법을 새롭게 한 안견파 화풍을 형성하여 당시의 화가들뿐 아니라 후대의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구체적으로 보면 남송대의 원체 화풍(院體畵風)과 남종 문인화풍인 미법산수(米法山水), 절파 화풍도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송하보월도 ,이상좌 ,비단에 담채 ,197cm x 82.2cm ,국립중앙박물관>

남송원체 화풍을 띠는 작품으로는 이상좌가 그린 것으로 전해오는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 를 들 수 있는데, 소나무를 그리는 법에서 남송대 마원(馬遠)의 화풍을 볼 수 있다.
또한 강희안의〈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는 덩굴풀이 우거진 절벽과 인물이 있는 소경 산수인물화로서 구도 면에서 절파풍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조선 전기에는 여러 화풍이 유입되어 다양한 화풍의 그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흐름을 이룬 것은 이곽파 화풍을 기반으로 한 안견파 화풍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작품은 그 후 겪게 되는 임진, 병자 양란으로 남아 있는 작품이 매우 적고 대부분이 전칭 작품(傳稱作品)이어서 전반적인 경향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2. 조선 중기( 제 2기 )
조선 중기(1550-1700)는 명종 연간부터 후기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기 전인 숙종 연간까지로 잡는다. 이때는 1592년에 일어났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정묘호란 등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화에 있어서는 특색 있는 한국적 화풍을 형성하였던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의 경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조선 전기에 유행하였던 안견(安堅)의 화풍을 이은 안견파 화풍(安堅派畵風)의 계승을 들 수 있다. 이들 안견파 화가들로는 이정근, 이흥효, 이징 등이며 이들은 새롭게 대두된 화풍보다는 전통적인 화풍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이를 계승했던 부류이다.
또 한 흐름은 중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화풍으로, 전기에 강희안(姜希顔)에 의해 소개되었던 절파계(浙派系) 화풍이다. 김시, 이경윤을 필두로 김명국과 여러 화가들에 의해 유행되었다. 특히 김명국은 절파(浙派) 화풍 중에서도 말기의 화풍인 광태사학파의 영향으로 몹시 거칠고 강렬한 화풍을 구사하였다. 5)


이외에도 남종화의 유입을 들 수 있다. 남종화풍은 물론 전기에도 나타나기 시작하나, 이정근의 〈미법산수도〉나 화조화(化鳥畵)가로 유명한 이영윤의 〈산수도〉등에서 본격적인 유입의 예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중기와 후기를 잇는 윤두서의 그림에서는 산수화에 있어서의 전통성과 함께 후기 풍속화의 발전을 예고하는 여러 풍속화들이 있어서 주목된다.







<산수인물도 ,전 이경윤 ,15세기 중엽 ,91.1*59.5cm ,국립중앙박물관>

이러한 산수화뿐 아니라 화조(花鳥)나 영모화, 사군자 등에 있어서도 한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였다. 동물화에 있어서는 이암이나 김식, 조속 등이 수묵(水墨)의 몰골법으로 따뜻하고 정감 어린 개나 소, 까치 등을 그려내어 회화의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하였다. 또한 묵죽(墨竹)에 탄은 이정, 묵매(墨梅)에 어몽룡, 묵포도(墨葡萄)에 황집중 등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화가들이 나와 이 시대 회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 중기의 회화는 이와 같이 조선 전기의 전통을 이어 계승하는 가운데 새로운 화풍을 수용하는 다양한 면을 보이면서 특유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과 보수적 경향때문 이었는지 이미 들어와 있던 남종화풍은 아직 적극적으로 유행되지 못했다.
3. 조선 후기( 제 3기 )
조선시대 후기(약 1700-1850)는 우리 회화사에 있어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적이고도 민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화풍이 풍미하였다. 가장 두드러진 것이 정선에 의해 이룩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완성과 김홍도에 의한 풍속화의 발전 등 민족 의식의 발현에 의한 새로운 화풍의 형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화풍의 발현은 조선 후기의 사상적 발전을 배경으로 하는데, 조선 후기 특히 영조(재위1724~1776), 정조(1776~1800) 연간에 부흥한 실학 사상(實學思想)의 발전은 조선 후기의 문화전반에 걸쳐 매우 중대한 의의 를 지니고 있다. 이때에는 조선 중기에 유행하였던 절파(浙派) 화풍이 쇠퇴하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다.6) 남종화의 유행은 중국에서 유입된 화보(畵譜)의 영향이 매우 큰데, 남종화가에 의해 꾸며진 《고씨역대명인화보(顧氏歷代名人畵譜)》나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당시화보(唐詩畵譜)》 등이 들어와 국내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심사정, 강세황, 이인상 등은 중국 남종화법을 수용하여 나름대로의 필법을 구사해 개성 있는 화풍을 형성하였다.
또한 한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실경을 한국적으로 발전된 남종화법을 구사하여 그려낸 산수화법의 진경산수화가 정선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본래 한국의 실경을 소재로삼아 그리는 화습은 이미 고려시대에 생겨 조선초기와 중기에 걸쳐 계속 전통맥락을 이어왔다.
그러나 정선일파의 진경산수는 비단 한국의 실경을 소재로 다룰뿐아니라 새로이 발전된 화풍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7) 진경산수화와 더블어 조선후기 회화에서 가장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풍속화 이다.

그와 함께 조선시대 후기인들의 생활상과 애정을 해학적으로 다룬 풍속화가 김홍도(1745~1816)와 혜원 신윤복, 긍제 김득신(1754~1822)을 비롯한 여러 화가들에 의해 그려지는 등 민족 의식이 한껏 고양되었다.
그뿐 아니라 중국을 통한 서양 화법이 수용되어 사용되었으며, 민화의 발전도 큰 변화의 하나이다. 민화는 상업의 발달로 인해 부유한 상인 계층이 늘어나면서 발전한다.
말하자면 전반적으로 생활이 향상됨에 따라 일부 계층에서만 향유되던 그림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됨에 따라 이러한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으로 민화 양식이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는 여러 분야의 많은 화가들에 의해 다양한 화풍이 발전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민족 의식의 확대로 우리의 산천을 독특한 화풍으로 그려내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우리의 생활 모습을 담아낸 풍속화의 대대적인 유행은 크게 주목해야 할 일이다.

4. 조선 말기( 제 4기 )
조선시대 말기(약 1850-1910)는 역사적으로 여러 사건을 겪게 됨으로써 회화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시기이다.
즉 조선 개항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놓고 미국, 일본, 중국, 소련 등 여러 나라들의 각축과, 이로 인해 벌어지는 국내에서의 세력 다툼, 외국 문물과 함께 들어온 기독교의 전래 등으로 사회가 어지럽게 급변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회화에도 영향을 미쳐 조선 후기와는 많은 차이를 드러낸다. 그 첫번째가 진경산수와 풍속화가 쇠퇴하고 김정희일파를 중심으로 남종화가 더욱 큰 세력을 떨치게 된 점이다. 또한 개성 강한 화가들이 나타나 참신하고 이색적인 화풍을 창조하기도 한 시기이며 몇몇 화가들에 의해 진경산수나 풍속화의 맥이 이어지기는 했으나, 후기에 보였던 약동하는 인물의 힘이나 해학성은 사라지고 형식만을 취한 그림이 그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민화로 흡수되어 새로운 형식으로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진경산수의 약화를 부추긴 김정희를 중심으로 문기(文氣)또는 서권기(書卷氣)를 숭상하는 남종화풍이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김정희와 그를 추종한조희룡(趙熙龍)(1789~1866),허유(許惟)(1809~1892), 전기(田琦)(1825~1854) 등을 위시한 남종문인화를 크게 발전시켜으며, 동시에 조선 후기에 유행을 본 토속적인 진경산수(眞景山水)와 풍속화에 쐐기를 박는 결과를 초래하였다.8)
이외에도 김수철(金秀哲)이나 김창수(金昌秀), 홍세섭(洪世燮) 등 참신한 기법의 이색화풍이 등장하였다. 말하자면 수채화풍을 연상시키는 신선한 색감과 구도로 말기 화단을 새롭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오원장승업(張承業)(1843~1920)과 같은 기량 있는 화가가 나와 그의 화풍을 따르는 화가들이 근대 화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대표적인 화가인 조석진과 안중식 등이 조선시대 화단의 말미를 장식했다.하지만 이들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격조는 그이전의 거장들에 비하여 현저히 하락된 것이였다.
조선왕조 말기의 정치적 소용돌이와 더블어 이 시대 회화의 수준도 전반적으로 저하되는 추세를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서화미술원9)과 같은 근대적 미술 교육기관을 열어 후진을 양성함으로써 근대 화단의 길을 열기 시작하였다.
Ⅲ. 결론
한국 문화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고 일본은 한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지극히 일반화된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 그림은 중국 그림과 사뭇 닮은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의 옛 그림은 단지 중국 그림을 모방한 아류일까? 이과제를 하면서 조선의회화의 그림을 시대별로 분석하면서 의문점이 생기게 되었다.
중국으로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줄기차게 영향을 받아왔지만 이를 단순히 그대로 베끼거나 모방에 그친 것은 아니며 이를 능동적이며 선별적으로 취사, 선택하여 그들과 구별되는 고유색 짙은 미감, 독자성과 개성이 뚜렷한 화풍을 이룩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이었다. 붓을 다룰 줄 알았던 선조들은 눈만을 통해 그 세계에 젖어든 것이 아닌, 그들의 손끝을 통해 선배가 이룩한 위대한 경지를 이해하려고 애썼다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앞선 시대의 거장의 그림을 임하거나 방함은 단순히 베끼는 작업이 아니라, 자기 손을 통해 거장들의 그림세계를 미루어 체험하는 행위인 것이다.
조선후기에 한국 산천을 화폭에 담은 진경산수(眞景山水)가 크게 유행하게 된다. '조선의 화성'으로 지칭되는 선비화가 정선(1676~1759)에 의해 이룩된 이 분야는 우리나라 회화의 역사에 있어 빛나는 업적이지만 그 이전 뿐 아니라 그 이후의 관념산수 등 세칭 중국풍의 그림들로 간주되기 쉬운 것들도 자세히 살피면 화면 내 구성이나 구도 등에서 구별되어 화풍에 있어 조선 나름의 특징이 선명하였다.
조선시대 회화 특징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첫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유와 자유분방한 상상이 깃들 수 있는 범주를 넓혀준다. 완벽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하지만 가까이 접근하기에는 어렵다. 중국 그림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기교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에 비할 때 우리 그림은 조촐해 보이는 면이 없지 않으나 단순함과 간결함이 주는 자유스러움이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에서 해방시켜 준다.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화풍을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되 이를 단순화시켜 조선적인 미감으로 선뜻 변화시킨다.
둘째, 감상화의 측면에서 채색의 사용은 수묵 위주의 담채가 주류를 이룬다. 조선 초 이암(1507~1566)의 개 그림을 살필 때 잘 알려진 <모견도>는 동화적인 분위기의 모성애가 짙게 풍기는 그림이다. 사용된 채색은 강아지 목에 붉은 줄과 금색 방울을 제외하고는 수묵뿐이다. 우리 산천을 그린 정선의 진경산수에 있어서도 <금강전도>의 예)에서처럼 먹과 담청만으로도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조선의 화선으로 지칭되는 김홍도(1745~1806)의 풍속화들도 같은 양상이다.
조선회화는 무엇보다 초기 인류의 그림이 자연을 모방했듯이 자연 속에서 익살이 깃든 삶의 낙천성을 바탕으로 한 한국인의 어질고 맑고 밝은 심성을 진솔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참고문헌

안휘준《한국 회화사》, 일진사, 2002, 서울
안휘준 《안견과 그의 화풍-몽유도원도를 중심으로 주》, 震檀學報 제38호, 1974.10
안휘준《韓國浙派畵風의 硏究》, 美述資料 제20호, 1977.6
이동주《韓國繪畵小史》, 서문당, 1972
이동주《우리 나라의 옛 그림》, 박영사, 1975
高裕燮《高麗時代의 繪畵의 外國과의 交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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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眞珠) 이슬 신으셨네
    꽃 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 오시는고

    님 찾아 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異象)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未安)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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