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말기(약 1700~1850)의 회화 ■
전기 조선회화가 15세기 중엽 세종대왕의 재위연간(在位年間 1419 - 1450)을 꽃 피우고, 송(宋)/원대(元代)의 회화의 영향을 바탕으로 한국적 특성을 형성했던 반면 후기의 회화는 명(明)/청대(靑代)의 회화를 소화하면서 보다 뚜렷한 민족적 자아의식을 발현했던 미술로 가장 한국적이고 민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화풍들이 풍미했던 시대로 절파(浙派)의 화풍이 쇠퇴하고 그 대신 문인화(文人畵), 남종화(南宗畵)가 본격적으로 유행하였으며, 남종화법에 기반을 두고 우리나라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천(山川)을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한 진경산수(眞景山水)가 대두하였으며, 풍속화(風俗畵)가 풍미하였으며, 민화(民畵)가 사랑받고 널리 유행하였으며,부분적으로 서양화법(西洋畵法)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후기(약 1700년~1850년)는 특히 두드러진 새 경향의 회화를 발전시킨 시대다. 가장 한국적이고도 민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화풍들이 이 시대에 풍미하였다. 이러한 후기의 회화는 세종 때부터 꽃피웠던 조선 초기의 회화와 비교되는 훌륭한 것이다. 초기의 회화가 송, 원대 회화의 영향을 바탕으로 한국적 특성을 형성했던 데 반하여, 후기의 회화는 명, 청대 회화를 수용하면서 보다 뚜렷한 민족적 자아 의식을 발현했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의 회화가 발전하게 된 것은 새로운 회화 기법과 사상의 수용 및 시대적 배경에 연유한다. 영조와 정조 연간에 자아의식을 토대로 크게 대두되었던 실학의 발전은, 조선 후기의 문화 전반에 걸쳐 매우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한국의 산천과 한국인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아 다룬 조선 후기의 회화는 실학의 추이와 매우 유사함을 보여준다.
새로운 화법의 전개와 새로운 회화관의 탄생이 기반을 둔 이 시대 회화의 조류로는
첫째 조선 중기이래 유행했던 절파계 화풍이 쇠퇴하고, 그 대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점이다.
둘째, 남종화법을 토대로 한반도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천을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진경산수가 겸재 정선일파를 중심으로 해 크게 발달한 점이다.
셋째, 조선 후기인들의 생활상과 애정을 해학적으로 다룬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등에 의해 풍미하게 된 점이며
넷째 서양화법이 전래되어 어느 정도 수용되기 시작했던 사실등을 들 수 있다.
남종 화법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전대에 전래되어 있었던 것이나 본격적인 유행을 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이다. 이 남종화법의 유행은 조선 후기의 회화가 종래의 북종화 기법을 탈피하여, 새로운 화풍을 창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대시켜 주었다. 또한 남종화법의 전개에는 남종 문인화론이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이 형사(形似)보다는 사의(寫意)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대두되어, 역시 참신한 화풍의 태동을 가능케 하였다. 후기의 강세황, 이인상, 신위, 그리고 말기의 김정희 등은 남종화의 유행을 부채질한 대표적인 인물이라 하겠다.
절파 화풍을 계승하면서 소극적으로 남종화풍을 받아들여 그린 인물로 윤두서를 주목할 만하다. 윤두서는 산수화는 물론 인물과 풍속화도 그렸는데, 그가 남종화풍을 계승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그의 「평사낙안도(平沙落雁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근경의 낮은 언덕과 종류가 다른 몇 그루의 나무들, 넓은 수면, 그 뒤편의 산들이 이루는 간결한 구도와 구성은 그가 남종화풍의 영향을 받아 독창적인 세계를 펼쳤음을알 수 있다.
곧이어 주목할 인물은 심사정이다. 심사정은 특히 산수와 화조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심사정의 산수화풍을 보여주는 작품의 하나로 「방심주산수도(倣沈周山水圖)」를들 수 있다. 근경에는 초가집 안에 앉아서 글을 읽고 있는 선비와 괴석 및 파초를 그려 넣어 문인취향을 한껏 살리고 있다. 초가집을 둘러싼 종류가 다른 나무들, 평평한 터전과 개울물 위에 놓인 다리, 원경의 주산에서 흘러내리는 폭포, 물 건너편의 절벽등이 어울려 고즈넉한 절경을 이루고 있다.
18세기의 화가들 중에서 남종화의 발전에 누구보다도 크게 기여한 인물은 강세황이다. 강세황은 산수화, 자화상을 비롯한 인물화, 화조화, 사군자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그의 남종화풍은 「야수허정도(野水虛亭圖)」에 드러나 있다. 여름 경치를 담은 이 작품은 구도나 필묵법, 준법 등에서 남종화풍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근경의 빈정자와 몇 그루의 나무들, 중경의 넓은 수면과 그 뒤편의 마을, 후경의 안온한 주산으로 이루어진 구도, 부드러운 필묵법과 담채법등이 특징이다.
18세기 남종화에 강세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인물이 이인상이다. 그는 단양에 은거하면서 남종화를 그렸는데, 그의 전형적인 화풍은 거의 20대에 형성되었다. 그가 그린「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를 보면 잘 나타난다. 소나무 밑에 홀로 앉은 선비가 웅장히 쏟아져 내리는 폭포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부채면이 만드는 형태적 특성과 그리고자 하는 화제가 더 바랄 여지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더운 날 부채 바람에 폭포수 밑의 시원함이 실릴듯한 느낌을 준다.
이 시기 남종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면 정수영을 들 수 있다. 그의 「방황공망산수도(倣黃公望山水圖)」에서 정수영 특유의 화법이 감지된다. 왼쪽 종반부에치우친 편파적 구도, 공간 처리, 각을 이루는 꼬불꼬불한 윤곽석, 간일한 형태, 푸른기운이 도는 색조와 먹의 효과 등은 그의 화풍이 짙게 배여있다.
조선 후기에는 화원 출신들도 남종화풍을 구사하였다. 이재관은 도화서에 속하지 않은 화가로 그의 작품을 보면 남종화의 정신 세계와 기법을 제대로 소화하여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귀어도(歸漁圖)」가 좋은 예이다. 잡은 고기를 망태기에 걸어 메고 달빛을 받으며 귀가하는 어부를 다루었다. 좌우가 균형을 이룬 구도, 근경의 초가집과 나무들이 산과 냇물과 어우러진 오밀조밀한 짜임새, 달빛을 받아 명암이 대조를 이루는 분위기, 농묵과 담채의 조화, 화면 전체에 넘치는 평화로운 분위기, 어부와 강아지 사이에 오고가는 반가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남종화법을 토대로 발전된 전형적인 한국적 회화가 바로 진경산수이다. 정선에 의해 발전된 진경산수화는 한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실경을 한국적으로 발전시켜 남종화법을 구사하여 그려낸 산수화를 말한다. 본래 한국의 실경을 소재로 삼아 그리는 화습은 이미 고려 시대에 생겨 조선 초기와 중기에 걸쳐 계속 전통의 맥락을 이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정선 일파의 진경산수는 비단 한국의 실경을 소재로 다루었을뿐만 아니라, 새로이 발전된 화풍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상상에 의한 중국적 산수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보고 느낀 직접적인 시각 경험을 생생하게 화폭에 담음으로 인해서 진경산수는 농도 짙은 생동감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이라 믿어진다.
또한 시각을 당기는 구도, 개성화된 각종 준법, 농담이 강한 필묵법과 안온한 설채법(設彩法) 등은, 정선과 그의 추종자들의 화풍을 더욱 한국적인 것으로 돋보이게 한다.
정선은 수많은 진경산수화를 남겼는데, 그 중 금강산과 서울 근교의 명소를 그린 것들이 중요하다. 그의 금강산 그림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금강전도(金剛全圖)」이다. 이 그림은 금강산을 부감법으로 그린 그림으로 원형 구도를 보여준다. 왼쪽 아래편에 나무가 우거진 산들을 배치하고, 오른편 대부분의 화면에는 날카로운 바위산들이 빽빽이 서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그림의 맨 위쪽 끝에는 비로봉을 묘사하였다. 이 산들과 하늘이 마주치는 여백의 가장자리에는 연푸른 색을 칠해 허공을 나타내었고, 첨봉들의 모습이 부각되게 했다. 화면 전체에는 생기가 힘차게 넘쳐난다. 이러한 형식의 금강산 그림은 후대 화가들에게 표본이 되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齊色圖)」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에 가장 흔한 암석인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인왕산은 특히 남성적인 형세를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강한 위용을 자랑하는 희뿌연 암봉들을 시커먼 먹을 찍어 쭉쭉 그어 내리는 강한 필세로 표현하였고 산의 중간에는 뿌연 여운을 두어 신비롭게 표현하는 등 인왕산에 대한 노화가의 주관적인 해석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산의 형태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면서 동시에 비온 뒤의 촉촉한 분위기를 한껏 강조한 시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정선의 화풍은 많은 화가들에 의해 추종되었는데, 그 중 강희언을 주목할 수 있다.「인왕산도(仁王山圖)」를 보자. 인왕산의 모습을 옆에서 빗겨 보아 산줄기들이 평행사선을 이루도록 묘사한 대담한 포치와 부감법을 따른 표현과 바위의 묘사에 나타나 있는 음영법 등을 보면 강희언이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을 따르면서 서양화법을 가미했음을 알 수 있다. 계곡의 마을과 그 주변의 나무들에는 늦은 봄의 갖가지 꽃들이 만개되어 늦은 봄의 정취를 짙게 풍긴다.
김홍도도 종종 진경산수를 그렸다. 「총석정도(叢石亭圖)」는 그의 진경산수의 일면을보여준다. 기둥처럼 늘어진 총석들, 오른쪽 언덕 위에 작게 그려진 총석정, 춤추는 듯한 소나무들, 김홍도 특유의 화법이 잘 표현되어 있고 그의 독특하고 완숙한 화풍을보여준다.
이 밖에도 김윤겸, 최북, 김응환 등 조선 후기의 대부분의 화가들이 진경산수화를 그렸다. 또 주로 남종화를 취급하던 사대부 문인화가들에 의해서도 진경산수화는 높은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진경산수와 더불어 조선 후기 회화에서 가장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풍속화이다. 넓은 의미에서의 풍속화는 이미 조선 초기와 중기의 각종 계회도(契會圖)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도 있겠으나, 속화라고 불리워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풍속화는 역시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등 후기 화원들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김홍도와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김득신은 주로 서민 생활의 단면들을 소재로 삼아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양반들을 대상으로 그 양반들을 위해 그려진 전대의 계회도와는 달리, 그들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생활과 직접적 관련에서 이루어졌다. 바지 저고리와 치마 저고리를 입은 조선 후기의 서민들이 그들의 주인공이며, 초가집과 논밭과 대장간이 그 주인공들의 활동 무대이다. 이러한 풍속화는 전대의 회화에서 찾아볼 수없는 새로운 것이다. 서민들의 생활 주변에서 찾은 재미있는 소재를 간결하면서도 초점을 이루는 구도 속에 익살스럽게 승화시킨 것이 김홍도와 김득신의 풍속화가 지니는 큰 특성이라 하겠다.
김홍도나 김득신과는 대조적으로 신윤복은 남녀간의 애정 문제를 파헤치는데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의 주인공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서민들이기보다는 인생의 즐거움을 음미하는 한량이나 기녀, 양반들이 대부분이다. 아직도 유교적인 규범이 엄했던 당시에 남녀간의 애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던 것은 당시의 사회적 풍조를 고려해도 대담한 용기를 필요로 했을 것이라 믿어진다. 신윤복은 산수나 옥우를 배경으로 그의 주인공들을 섬세하고 유연한 필치와 산뜻한 채색을 구사하여 세련되게 표현하였다. 이렇듯 신윤복은 소재의 선택, 구도, 배경의 설정, 필법, 설채법 등등 다각적인 면에서 김홍도와 김득신과 큰 차이점을 보여 준다.
김홍도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산수, 인물, 영모, 화조 등 모든 분야에 뛰어났던 18세기의 대표적 화원이다. 그의 공적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국적인 화풍을 풍속화 부분에서 창출하여 조선시대 우리 문화와 역사의 이해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그는 풍속화가 지녀야 할 시대성, 기록성, 사실성을 살려 창의성과 해학성으로 풍속화를 예술적 세계로 승화시켰다. 김홍도는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재미있는 소재를 포착하여 해학이 넘치는 미의 세계로 구체화하였다. 대부분 서민들의 일상생활이나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을 소재로 한다.
그의 단원풍속화첩에 실린 「씨름」은 그가 18세기 풍속화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말해준다. 씨름하는 인물들과 주변의 구경꾼들을 효과적인 원형 구도로 포착한 이 작품은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한 풍속화의 대명사로 불리는 김홍도의 세련된 기량을 보여준다. 씨름하는 순간의 흥분된 분위기를 전달하는 여러 인물들의 생동감 넘치는 자세와익살맞은 표정들, 투박한 듯하면서도 간결한 격조를 잃지 않은 개성적인 선묘, 여유로운 공간의 운용 등 뛰어난 점을 찾아 볼 수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들은 우리네 일상사의 주변 삶의 현장을 재치있게 재현하면서 우리 민족의 건전한 정서와 미감을 잘전달해 주고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그의 제자인 김득신에게 충실하게 계승되었다. 김득신도 김홍도처럼 병풍에 산수 배경을 중시하여 그린 것과 산수배경 없이 풍속 장면만을 그린 두가지 계통의 풍속화를 제작하였다.
김득신의 「파적」은 그의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한적한 봄날, 농가의 안마당에서 생긴 사건을 포착하여 그렸다. 병아리 한 마리를 낚아 채고 도망가는 고양이와 이를 쫓는 어미닭, 이에 놀라 황급히 버선 바람으로 마당으로 뛰어내리며 고양이를 향해 소리지르는 주인과 그 부인. 순간적으로 벌어진 상황을 생생하게 표현했으며, 주인 영감의 시선과 고양이의 잽싼 눈빛, 주인 마나님의 화들짝 놀라는 움직임 등이 작품 전체에 긴장감을 돋우어 준다.
김홍도나 김득신과는 또 다른 측면의 풍속화를 개척한 인물이 신윤복이다. 신윤복은 김홍도의 화풍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기 자신의 독특한 풍속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우리나라 회화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윤복 풍속화의 높은 수준과 전형적인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은「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이다. 모두가 잠든 고즈넉한 달밤에 밀회를 즐기는 한 쌍의 남녀를 표현한 이 작품은 신윤복 특유의 은근하고도 감각적인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깊은 밤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알리"라고 한 화제가 그림의 분위기를 한층 돋우는데, 살며시 고개 숙인 수줍은 여인과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는 훤칠한 미남의 모습이 낭만적인 정서를 전달해 준다.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표현과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색조의 사용 등 신윤복은 새로운 미감의 풍속화의 경지를 개척해내었다.
조선 후기에는 인물화에서도 새로운 양상과 진전이 이루어졌다. 이 시대 인물화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초상화이다.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린 표현은 물론 그인물이 가지고 있는 성격, 교양, 학문 등을 얼굴에 배어나도록 그리는 경지를 빼어나게 구현하였다.
이 시대 초상화 중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윤두서가 그린 「자화상」이다. 윤두서는 인물이나 동물을 그릴 때에는 며칠 동안 관찰하여 그 진형을 파악한 다음에야 비로소 붓을 들었고 이 때문에 그의 말그림과 인물화는 생동적이다. 이 점은 그의 자화상에서도 확인된다. 이 작품은 한국의 몇 안되는 자화상 중의 하나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전신상이거나 상반신 상으로 그려지는 초상화의 전통적인 관례를 무시하고 화면을 직시하는 강렬한 시선의 얼굴 부분을 강조한 이 작품은 뛰어난 사실감과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느끼게 하는데, 거울을 보고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수염을 그리는데 사용된 생동감 넘치는 섬세한 선묘와 면으로 처리된 두건 부분의 대범한 묵법, 안구와 눈동자 및 눈 주변에 사용된 배채기법은 화가의 폭넓은 기량을 보여준다.
18세기 인물화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신윤복의 「미인도」를 들 수 있다. 살포시 비껴 틀어 서 있는 요염한 자태의 이 여인은 한국의 전형적인 미인상을 보여준다. 초승달 같은 눈썹에 은행같은 두 눈, 앵두 같이 빨갛고 작은 입술, 둥그레한 가녀린 얼굴 선, 몸에 착 달라붙은 저고리로 드러난 홀쭉한 몸매, 배추 포기처럼 부풀은 치마, 오이씨 같이 고운 발맵시 등 고혹적이면서도 결코 천박하지 않은 자태를 뛰어나게 표현한 신윤복은 여인상에 관한 한 거의 독보적인 화가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간결한 필선, 정확하고 사실적인 조형, 품위 있는 색채의 절제된 구사 또한 작품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물화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뚜렷하게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변상벽이다. 그는 고양이 그림 전문가가 되어 '변고양'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의 유명한 「묘작도(猫雀圖)」는 그의 고양이 그림의 진면목을 잘 보여준다. 왼편 아래에서 솟아오른 뒤틀린 고목 위를 한 마리의 고양이가 기어오르다 나무 밑에 앉아 올려다 보는 고양이를 대화라도 하듯이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두 마리의 고양이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감이 인상깊게 나타난다. 고목의 윗부분은 와면에서 잘린 듯 표현되었는데 가지들에는 약간의 잎들이 파리하게 나 있고 여섯 마리의 참새들이 짹짹거리고 있다. 나무를 기어오르는 고양이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나무와 굵은 가지는 여기저기에 연륜을 말해 주는 큼직한 옹이들이 나 있으며 뒤틀리듯 비틀어져 있다. 변상벽의 고양이 그림은 조선 초기 이암의 강아지 그림과 함께 우리 나라 동물화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이 밖에 정조대왕의 파초, 매화, 국화 그림, 심사정의 화조와 초충, 유덕장과 신위의 대나무, 임희지의 난초 등도 유명하다.
또 조선 후기의 회화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중국을 통한 서양 화법의 전래와 수용이다. 명암법과 원근법 및 투시도법이 특징인 서양법은 청조에서 활약한 서양 신부들에 의해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우리 나라는 연경을 오고가는 사행원들의 손을 거쳐 전래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김두량, 이희영, 박제가 등의 일부 18세기 화가들이 수용하기 시작한 서양화법은 그 후에도 화원들에 의해 궁궐의 의궤도(儀軌圖)나 민화의 책꽂이 그림 등에도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 화가들이 수용한 서양화법은 오늘날의 유화와는 달리 한국적 소재를 명암이나 요철법 또는 투시도법을 가미하여 다룬 수묵화의 한 가지이다. 이 화법은 널리 유행하지는 않았지만 회화사의 근대화를 예시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이 화법의 전래와 수용은 19세기의 한국 회화가 이색적인 화풍을 형성할 수 있게 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 믿어진다.
지금까지 분야별로 간략하게 소개했듯이 조선 후기에는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한국적인 회화가 각 분야에서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에 무르익어 19세기 전반기까지 계속되었으나 조선 말기로 편년되는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큰 성격의 변화를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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