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화조화 이야기

조선시대에 미술 중에서도 회화는 우리 나라 미술사상 가장 크게 발전을 한 시기이다. 건국 초부터 도화원(圖畵圓)이 설치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회화미술이 꽃피게 되었다. 상당수의 사대부 화가들이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불교를 삼았던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와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여 그 전까지의 문화와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냈다. 즉, 이 시대를 시종일관 지배했던 억불숭유정책은 당시의 문화를 검소하고 실용적이며 소박한 성격의 것으로 발전하게 했다. 조선시대의 회화는 고려시대보다도 더욱 다양해졌고, 한국화현상을 더욱 뚜렷하게 이룩하였다. 이러한 한국화 현상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구도, 공간처리, 필묵법, 준법, 수기법등에 현저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회화는 5세기 이상의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변화를 거듭하였던 것이니, 양식(樣式)의 변천에 따라 초기(1392~약1550년), 중기(약1550년~약1700년), 후기(약1700~약1850년), 말기(약1850년~1910년)의 4기로 나눌 수 있다

1.조선 전기( 제 1기 )
조선 초기는 조선 왕조가 건립된 14세기말부터 15세기말까지 약 백년간으로, 고려 때에 비하여 그림의 환경이 달랐다. 유교가 국교가 됨에 따라 유교 교양을 지닌 사대부·문인의 취미가 감상화를 지배하였고, 나라에 도화서(圖畵署)가 설치되어 화원들의 활동이 명백하게 되었다. 곧 조선왕조에 들어서면 예배·기원의 불화가 아닌 감상화가 그림의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는 우리 역사상 회화가 다양한 양상을 띠며 대단한 발전을 이룩했던 시기 이다. 고려시대와는 달리 억불 숭유 정책으로 고려시대에 많은 활약을 했던 승려들의 활동은 약화되었지만, 학문을 중시하고 소박하고 진실됨을 추구하던 유교 정신을 새로운 미의식을 창출해내었다. 2)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청록산수화와는 달리 담백한 수묵(水墨) 위주의 산수화가 주를 이루고, 화조화나 영모화에 있어서도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 배어나오는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선비들의 경우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천기(賤技)로 생각하여 경시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조선시대의 그림을 기교에 빠지지 않고 더욱 담백하고 기품 있는 그림으로 승화시켰을 것이다.
또한 조직화된 도화서를 중심으로 기량이 뛰어난 화가들이 배출되어 한국화의 폭을 넓혔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부터 유입되기 시작하던 중국의 회화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회화 전통은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수묵화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조선 전기(1392-1550)는 조선왕조가 개국하여 국가적으로 나라의 기강을 확고히 하고, 회화에 있어서도 조선시대 특유의 한국적 화풍이 자리를 잡는 시기인 중종 연간까지를 잡는다. 이때는 새로 정비된 제도 하에서 도화서를 중심으로 한 화원 화가들과 선비 화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 시대에는 이미 고려시대에 들어온 중국 그림과, 새롭게 유입된 명대의 화풍이 토대가 되어 한국적 화풍을 형성해 갔다.

조선 초기 최대의 거장 안견은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른 전칭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다. 그런데 이들 그림을 통해서 보면, 안평대군의 수장품 목록에도 있는 곽희(郭熙)의 화풍을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곽희파 화풍은, 조선 초기의 산수화단에 제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안견(安堅)화풍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안견의 화풍에는 비단 곽희파 화풍뿐만 아니라 남송 원체파 화풍과 원말 명조(元末明初)의 매너리즘의 여향도 가미된 것은 사실이자만 그 주된 기반은 역시 곽희파 화풍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그러나 이를 바탕으로 구도와 필법을 새롭게 한 안견파 화풍을 형성하여 당시의 화가들뿐 아니라 후대의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구체적으로 보면 남송대의 원체 화풍(院體畵風)과 남종 문인화풍인 미법산수(米法山水), 절파 화풍도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송하보월도 ,이상좌 ,비단에 담채 ,197cm x 82.2cm ,국립중앙박물관>

남송원체 화풍을 띠는 작품으로는 이상좌가 그린 것으로 전해오는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 를 들 수 있는데, 소나무를 그리는 법에서 남송대 마원(馬遠)의 화풍을 볼 수 있다.
또한 강희안의〈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는 덩굴풀이 우거진 절벽과 인물이 있는 소경 산수인물화로서 구도 면에서 절파풍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조선 전기에는 여러 화풍이 유입되어 다양한 화풍의 그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흐름을 이룬 것은 이곽파 화풍을 기반으로 한 안견파 화풍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작품은 그 후 겪게 되는 임진, 병자 양란으로 남아 있는 작품이 매우 적고 대부분이 전칭 작품(傳稱作品)이어서 전반적인 경향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2. 조선 중기( 제 2기 )
조선 중기(1550-1700)는 명종 연간부터 후기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기 전인 숙종 연간까지로 잡는다. 이때는 1592년에 일어났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정묘호란 등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화에 있어서는 특색 있는 한국적 화풍을 형성하였던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의 경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조선 전기에 유행하였던 안견(安堅)의 화풍을 이은 안견파 화풍(安堅派畵風)의 계승을 들 수 있다. 이들 안견파 화가들로는 이정근, 이흥효, 이징 등이며 이들은 새롭게 대두된 화풍보다는 전통적인 화풍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이를 계승했던 부류이다.
또 한 흐름은 중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화풍으로, 전기에 강희안(姜希顔)에 의해 소개되었던 절파계(浙派系) 화풍이다. 김시, 이경윤을 필두로 김명국과 여러 화가들에 의해 유행되었다. 특히 김명국은 절파(浙派) 화풍 중에서도 말기의 화풍인 광태사학파의 영향으로 몹시 거칠고 강렬한 화풍을 구사하였다. 5)


이외에도 남종화의 유입을 들 수 있다. 남종화풍은 물론 전기에도 나타나기 시작하나, 이정근의 〈미법산수도〉나 화조화(化鳥畵)가로 유명한 이영윤의 〈산수도〉등에서 본격적인 유입의 예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중기와 후기를 잇는 윤두서의 그림에서는 산수화에 있어서의 전통성과 함께 후기 풍속화의 발전을 예고하는 여러 풍속화들이 있어서 주목된다.







<산수인물도 ,전 이경윤 ,15세기 중엽 ,91.1*59.5cm ,국립중앙박물관>

이러한 산수화뿐 아니라 화조(花鳥)나 영모화, 사군자 등에 있어서도 한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였다. 동물화에 있어서는 이암이나 김식, 조속 등이 수묵(水墨)의 몰골법으로 따뜻하고 정감 어린 개나 소, 까치 등을 그려내어 회화의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하였다. 또한 묵죽(墨竹)에 탄은 이정, 묵매(墨梅)에 어몽룡, 묵포도(墨葡萄)에 황집중 등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화가들이 나와 이 시대 회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 중기의 회화는 이와 같이 조선 전기의 전통을 이어 계승하는 가운데 새로운 화풍을 수용하는 다양한 면을 보이면서 특유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과 보수적 경향때문 이었는지 이미 들어와 있던 남종화풍은 아직 적극적으로 유행되지 못했다.
3. 조선 후기( 제 3기 )
조선시대 후기(약 1700-1850)는 우리 회화사에 있어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적이고도 민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화풍이 풍미하였다. 가장 두드러진 것이 정선에 의해 이룩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완성과 김홍도에 의한 풍속화의 발전 등 민족 의식의 발현에 의한 새로운 화풍의 형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화풍의 발현은 조선 후기의 사상적 발전을 배경으로 하는데, 조선 후기 특히 영조(재위1724~1776), 정조(1776~1800) 연간에 부흥한 실학 사상(實學思想)의 발전은 조선 후기의 문화전반에 걸쳐 매우 중대한 의의 를 지니고 있다. 이때에는 조선 중기에 유행하였던 절파(浙派) 화풍이 쇠퇴하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다.6) 남종화의 유행은 중국에서 유입된 화보(畵譜)의 영향이 매우 큰데, 남종화가에 의해 꾸며진 《고씨역대명인화보(顧氏歷代名人畵譜)》나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당시화보(唐詩畵譜)》 등이 들어와 국내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심사정, 강세황, 이인상 등은 중국 남종화법을 수용하여 나름대로의 필법을 구사해 개성 있는 화풍을 형성하였다.
또한 한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실경을 한국적으로 발전된 남종화법을 구사하여 그려낸 산수화법의 진경산수화가 정선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본래 한국의 실경을 소재로삼아 그리는 화습은 이미 고려시대에 생겨 조선초기와 중기에 걸쳐 계속 전통맥락을 이어왔다.
그러나 정선일파의 진경산수는 비단 한국의 실경을 소재로 다룰뿐아니라 새로이 발전된 화풍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7) 진경산수화와 더블어 조선후기 회화에서 가장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풍속화 이다.

그와 함께 조선시대 후기인들의 생활상과 애정을 해학적으로 다룬 풍속화가 김홍도(1745~1816)와 혜원 신윤복, 긍제 김득신(1754~1822)을 비롯한 여러 화가들에 의해 그려지는 등 민족 의식이 한껏 고양되었다.
그뿐 아니라 중국을 통한 서양 화법이 수용되어 사용되었으며, 민화의 발전도 큰 변화의 하나이다. 민화는 상업의 발달로 인해 부유한 상인 계층이 늘어나면서 발전한다.
말하자면 전반적으로 생활이 향상됨에 따라 일부 계층에서만 향유되던 그림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됨에 따라 이러한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으로 민화 양식이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는 여러 분야의 많은 화가들에 의해 다양한 화풍이 발전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민족 의식의 확대로 우리의 산천을 독특한 화풍으로 그려내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우리의 생활 모습을 담아낸 풍속화의 대대적인 유행은 크게 주목해야 할 일이다.

4. 조선 말기( 제 4기 )
조선시대 말기(약 1850-1910)는 역사적으로 여러 사건을 겪게 됨으로써 회화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시기이다.
즉 조선 개항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놓고 미국, 일본, 중국, 소련 등 여러 나라들의 각축과, 이로 인해 벌어지는 국내에서의 세력 다툼, 외국 문물과 함께 들어온 기독교의 전래 등으로 사회가 어지럽게 급변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회화에도 영향을 미쳐 조선 후기와는 많은 차이를 드러낸다. 그 첫번째가 진경산수와 풍속화가 쇠퇴하고 김정희일파를 중심으로 남종화가 더욱 큰 세력을 떨치게 된 점이다. 또한 개성 강한 화가들이 나타나 참신하고 이색적인 화풍을 창조하기도 한 시기이며 몇몇 화가들에 의해 진경산수나 풍속화의 맥이 이어지기는 했으나, 후기에 보였던 약동하는 인물의 힘이나 해학성은 사라지고 형식만을 취한 그림이 그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민화로 흡수되어 새로운 형식으로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진경산수의 약화를 부추긴 김정희를 중심으로 문기(文氣)또는 서권기(書卷氣)를 숭상하는 남종화풍이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김정희와 그를 추종한조희룡(趙熙龍)(1789~1866),허유(許惟)(1809~1892), 전기(田琦)(1825~1854) 등을 위시한 남종문인화를 크게 발전시켜으며, 동시에 조선 후기에 유행을 본 토속적인 진경산수(眞景山水)와 풍속화에 쐐기를 박는 결과를 초래하였다.8)
이외에도 김수철(金秀哲)이나 김창수(金昌秀), 홍세섭(洪世燮) 등 참신한 기법의 이색화풍이 등장하였다. 말하자면 수채화풍을 연상시키는 신선한 색감과 구도로 말기 화단을 새롭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오원장승업(張承業)(1843~1920)과 같은 기량 있는 화가가 나와 그의 화풍을 따르는 화가들이 근대 화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대표적인 화가인 조석진과 안중식 등이 조선시대 화단의 말미를 장식했다.하지만 이들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격조는 그이전의 거장들에 비하여 현저히 하락된 것이였다.
조선왕조 말기의 정치적 소용돌이와 더블어 이 시대 회화의 수준도 전반적으로 저하되는 추세를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서화미술원9)과 같은 근대적 미술 교육기관을 열어 후진을 양성함으로써 근대 화단의 길을 열기 시작하였다.
Ⅲ. 결론
한국 문화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고 일본은 한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지극히 일반화된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 그림은 중국 그림과 사뭇 닮은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의 옛 그림은 단지 중국 그림을 모방한 아류일까? 이과제를 하면서 조선의회화의 그림을 시대별로 분석하면서 의문점이 생기게 되었다.
중국으로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줄기차게 영향을 받아왔지만 이를 단순히 그대로 베끼거나 모방에 그친 것은 아니며 이를 능동적이며 선별적으로 취사, 선택하여 그들과 구별되는 고유색 짙은 미감, 독자성과 개성이 뚜렷한 화풍을 이룩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이었다. 붓을 다룰 줄 알았던 선조들은 눈만을 통해 그 세계에 젖어든 것이 아닌, 그들의 손끝을 통해 선배가 이룩한 위대한 경지를 이해하려고 애썼다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앞선 시대의 거장의 그림을 임하거나 방함은 단순히 베끼는 작업이 아니라, 자기 손을 통해 거장들의 그림세계를 미루어 체험하는 행위인 것이다.
조선후기에 한국 산천을 화폭에 담은 진경산수(眞景山水)가 크게 유행하게 된다. '조선의 화성'으로 지칭되는 선비화가 정선(1676~1759)에 의해 이룩된 이 분야는 우리나라 회화의 역사에 있어 빛나는 업적이지만 그 이전 뿐 아니라 그 이후의 관념산수 등 세칭 중국풍의 그림들로 간주되기 쉬운 것들도 자세히 살피면 화면 내 구성이나 구도 등에서 구별되어 화풍에 있어 조선 나름의 특징이 선명하였다.
조선시대 회화 특징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첫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유와 자유분방한 상상이 깃들 수 있는 범주를 넓혀준다. 완벽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하지만 가까이 접근하기에는 어렵다. 중국 그림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기교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에 비할 때 우리 그림은 조촐해 보이는 면이 없지 않으나 단순함과 간결함이 주는 자유스러움이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에서 해방시켜 준다.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화풍을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되 이를 단순화시켜 조선적인 미감으로 선뜻 변화시킨다.
둘째, 감상화의 측면에서 채색의 사용은 수묵 위주의 담채가 주류를 이룬다. 조선 초 이암(1507~1566)의 개 그림을 살필 때 잘 알려진 <모견도>는 동화적인 분위기의 모성애가 짙게 풍기는 그림이다. 사용된 채색은 강아지 목에 붉은 줄과 금색 방울을 제외하고는 수묵뿐이다. 우리 산천을 그린 정선의 진경산수에 있어서도 <금강전도>의 예)에서처럼 먹과 담청만으로도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조선의 화선으로 지칭되는 김홍도(1745~1806)의 풍속화들도 같은 양상이다.
조선회화는 무엇보다 초기 인류의 그림이 자연을 모방했듯이 자연 속에서 익살이 깃든 삶의 낙천성을 바탕으로 한 한국인의 어질고 맑고 밝은 심성을 진솔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참고문헌

안휘준《한국 회화사》, 일진사, 2002, 서울
안휘준 《안견과 그의 화풍-몽유도원도를 중심으로 주》, 震檀學報 제38호, 1974.10
안휘준《韓國浙派畵風의 硏究》, 美述資料 제20호, 1977.6
이동주《韓國繪畵小史》, 서문당, 1972
이동주《우리 나라의 옛 그림》, 박영사, 1975
高裕燮《高麗時代의 繪畵의 外國과의 交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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