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산수 자연이 건네주는 아름다움이 무엇이기에, 현대인은 그것을 그토록 잊지 못해 그리워하고 즐기려 하는가? 오늘날은 안방에 앉아서도 세계의 자연을 다큐멘터리로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실재하는 산천을 찾아가 꼭 그 현장에서 보고 느끼면서 그려 보려고 하는지를 자문하게 된다. 직접적인 체험에서 누리는 즐거움은 무엇보다도 자연과의 교감 그 자체이다. 결코 간접 경험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통찰을 거기에서 이끌어낼 수 있다. 이것이 곧 예술 창조력의 밑거름인 동시에 아름다움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 비밀의 문을 열었다 해서 아름다운 그림이 그냥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니다. 화법의 수련이 있어야 한다. 화법은 화가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것은 마치 일상의 뜻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 말과 글이 필요하고, 또 올바른 습득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과도 같다.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은 산수를 감상할 때에 그 즐거움과 함께 품격을 본다고 하였다. 이것은 경관의 빼어남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화법의 수련이 또한 필요함을 말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화법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다르고, 중심 지역과 변방에 따라 다르고, 개인의 성품이나 재능에 따라서도 다르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표현법을 일구어낼 수 있을까?
실경산수화는 관념 산수화의 대개념으로, 우리나라 산수 경치의 자연미를 우리의 화법으로 표현해 내는 데 그 의의를 두고 있다. 조선후기의 진경산수 화법이 18세기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에 의해 창시된 이래, 명나라 오파의 산수화풍을 소화 흡수하여 조선의 화풍으로 이끌어내게 되는 즉,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을 비롯한 여러 문인화가들이 이러한 진경화법의 새로운 전통을 일으켜 세운다. 이러한 전통을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가 더욱 세련된 화풍으로 다듬어 낸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조선후기 실경산수화의 전통 및 예술적 성과를 그리워하여 그 맥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실경산수화에는 수묵화의 원리 및 실경의 아름다움이 안팎으로 잘 깃들어 있다. 수십억 년 유구한 지구의 형성 과정에서 인간의 손때를 멀리하고 아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자연은 지질시대의 기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 숭고하리만치 아름답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산천은 날이 갈수록 인간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상처가 깊어지고 있다. 물론 산천의 아름다움이란 표면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내부를 움직이는 힘과 이치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인문적, 심미적 관점으로도 눈여겨볼 만하고 역사적 인식이나 지질학적 이해도 필요한데, 산수화의 표현법으로 대표되는 준법(皴法)의 탄생이 바로 그러한 관심과 이해에서 비롯되고 있다. 예를 들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에서 엿보이는 피마준(披麻皴)이나 미점(米點), 그리고 괴량감 넘치는 대부벽준(大斧劈皴) 형태의 적묵암준법(積墨岩皴法)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준법에 대한 탐구를 본 연구의 기본 과제로 삼는다.
돌이켜보면, 실경산수화의 전통은 겸재 정선 이래로 ‘이형사신(以形寫神)’의 사실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사실정신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현될 수 있다. 시대상이나 화가의 개성에 따라 해석의 문제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은 서양화의 풍경화법이 한국적 정서로 재해석되어, 사실성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안타까운 것은 실경산수화에도 카메라 시각의 이미지가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사실정신을 심하게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퇴행적 수법이 알게 모르게 새로운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이것을 반성하는 입장에서 선택한 방법론이 현장사생이다. 현장사생은 사실정신을 직접적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실험정신이다. 곧 산수의 본질과 화가의 정신이 실질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또 하나의 창조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현장사생을 통해 조선후기 실경산수 화법의 사실정신을 요즘의 실정에 맞게 적용하는 데에 연구의 중점을 둔다. 열망하는 바, 이름난 명승지뿐 아니라 생활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즐겁게 바라볼 것이다. 이즈음 널리 퍼진 카메라 시각에 대한 맹신을 물리치고, 그것의 왜곡과 편협성을 바로잡아 나가도록 하겠다. 나아가서 사실과 추상이 둘이 아니니 만치, 이른바 점, 선, 면을 표현 요소로 삼는 추상화법을 활용하여 사실과 추상을 하나로 녹여내어 보겠다. 이리하여 실경산수화에서 현대성과 예술성이 함께 갖추어지도록 하겠다. 이때 겸재와 단원 같은 분들이 추구했던 사실화풍을 직·간접으로 참고하도록 한다. 이리하여 한국 산수화의 정통을 이어받고 스스로의 진실한 미감을 살려서 연구자 나름대로의 개성을 펼쳐나가도록 노력하겠다. 무엇보다 여성으로서 연구자의 눈에 비추어지는 섬세한 감정을 꾸밈없이 잘 드러내도록 하겠다. 물론 짧은 연구 기간에 한국의 산천을 두루 다 찾아다닐 수가 없다. 제한된 범위 내에서일지라도 실경을 마주한 감동을 펼쳐서 현대적인 표현법을 이끌어내도록 애쓰겠다. 그러한 회화적 성과를 묶어서 전시회를 열고, 이것을 바탕으로 실경산수화 이론의 틀을 다져나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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