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변용 임순득의 실경산수화 

 

혜당 임순득의 실경산수화는 전통적 기법으로 현실의 대상들을 그려냄으로써, 옛 전통을 현대로 연장시키고, 지금의 현재를 다시금 새롭게 조명한다.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한국화는 한국적인가? 조선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 한국에서 건물을 짓는다는 말은 기와집, 초가집이 아닌 빌딩이나 아파트를 짓는 것을 의미하고 공부를 한다는 말은 성리학, 이기론이 아닌 서양의 학제에 따른 학문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현대 한국사회에는 서구의 문화가 뿌리깊게 자리잡았다. 우리가 한국적인 것, 한국만의 고유한 것이라 불렀던 우리의 전통들은 이미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 되었다. 한국적이었던 것이 더 이상 한국에 없다면, 그것은 한국적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전통 속에 존재한다.


 혜당의 실경산수화는 전통이되, 그 전통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내포한다. 실경산수화의 요체는 그 대상을 오직 추상적으로 그리는 것도, 오직 있는 그대로 보는 것도 아닌, 실제 풍경을 보고 창작자가 느낀 바를 화폭에 진정성 있게 담아내는 것에 있다. 이 과정에서 창작자는 그 대상을 관념과 실재 사이에서 매개하고 이형사신의 정신 아래에서 그의 심상에 생생하게 충돌하는 인상으로서 그 풍경을 새롭게 창조한다. 그렇기에 실경산수화는 전통의 준법, 기법에 매몰된 경직된 추상예술도, 현재의 사실, 순간만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기에 급급한 유행도 아니다. 임순득의 작품세계에는 이러한 정신이 담겨있다. 표현법에 대한 깊은 고민을 거쳐 근래의 투시원근법, 일률적 명암법에 매몰되지 않고 근대 이전의 이동시점과 농담법을 다시금 회복한 연구 성과가 이를 드러낸다. 이러한 전통의 변용은 표현에 진정성을 갖추기 위해 몇 번이고 실제의 현장을 찾아가는 노력과 맞물려 있다. 혜당의 작품들은 이러한 이론과 실천의 교차점에서만 가능했던 성과이다.


 혜당의 이러한 창작활동은 전통적인 표현 기법을 그 뼈대로 삼지만, 오직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머무를 수도 없다. 한국은 이미 도시를 중심으로 한 생활권이 형성되었지만, 외려 그렇기에 현대인들의 마음에는 자연, 고즈넉한 평화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다. 혜당은 그러한 현대인의 고유한 정서를 화폭 안에 담아낸다. 그 작품들은 도심지를 벗어나 마주할 수 있는 자연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그 그림 속에 등장하곤 하는 사람들과 건물들은, 자연이라는 추상적인 이상에만 머물지 않는 진정성, 그러한 사실정신을 드러낸다. 작품 ‘두 강물의 만남’에서 자연과 도심을 넘어, 그 진정성을 통해 도심 속에서 자연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란 무엇인지도 볼 수 있다. 실제로도 우리 주변의 자연, 산천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삶을 둘러싼 자연은 분명 일상과는 분리되어 있다. 즉, 떨어져 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아른거리며 우리를 부르는 대상이기에, 우리는 그런 자연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임순득은 이러한 현대인만의 고유한 정서를 그 화폭 안의 진정성을 통해 선명하게 빚어낸다. 이번 전시를 위해 공 개된 작품들은 창작자 본인이 거주하는 도시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의 산천들을 담고 있다. 이는 비단 작품 속에 꼭 인위적인 건물,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감상자들에게 그 진정성을 느낄 수 있게끔, 달리 말해 우리 주변의, 우리가 그리워하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느낄 수 있게끔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정신과 표현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기반으로 혜당의 한국화는 우리의 전통을, 이미 수명을 다하여 낡고 퀘퀘해진 전통이 아닌, 우리의 정신 속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생생한 전통으로 만든다.


 혜당 임순득의 작품세계는 전통 속으로의 도정이자, 전통을 타고 현대를 누비는 여정이다. 그러한 도정 속에서 우리는 한국적인 것의 밑바탕을 찾고, 그 여정을 통해 우리의 전통이라는 밑바탕이 여전히 한국적일 수 있다는 증거를 발견한다. 그 꿈이 아무리 높다 한들, 사람은 발 디딜 땅 없이는 걸어갈 수도 없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길을 잃은 한국인들에게, 혜당의 실경산수화는 전통이라는 너른 벌판을 마련한다.
                                                                                                                                                  이희찬 (서울대 철학과 4년)

+ Recent posts